[내 고장 문화유적 탐방] 87. 돌로 만든 비각(碑閣)을 보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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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10]

1) 프롤로그


문화유적탐방을 하다보면 종종 ‘(신도)비각’이니 ‘정려각’이니 하는 것들을 만나게 된다. 익히 알다시피 비각은 비를 보호하기 위해 지은 건축물이고, 정려각은 정려를 보호하기 위해 지은 건축물이다. 이 두 건축물은 보호해야하는 대상의 크기가 크지 않으므로 대체로 작고 아담한 크기의 전통목조건축양식을 취하고 있다. 그런데 드물게는 목조건축물이 아닌 돌로 만든 비각이 있다. 이번에는 우리 고장에서 만날 수 있는 돌로 만든 비각에 대해 알아보기로 하자.


2) 비를 보호하기 위한 집


비각(碑閣)은 한자어로 비를 보호하기 위해 지은 집을 말한다. 우리말로는 말 그대로 뜻 그대로 ‘빗집’이라고 하면 된다. 비각은 비의 등장과 동시에 나타난 건축양식은 아니다. 고대 중국의 비는 물론 광개토대왕비, 진흥왕 순수비 등과 같은 오래된 우리나라의 비 역시 기록이나 발굴조사 등에서 비각이 있었다는 사실은 보고된 바가 없다. 비각이 처음 세워진 것은 중국 송나라 시대 이후로 알려져 있다. 당시 골동품에 대한 관심과 함께 오래된 비에 대한 관심도 함께 높아졌는데, 이때부터 비를 보존하기 위한 방편의 하나로 비각이 세워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조선후기 영조 때부터 왕릉 등에 정자각과 더불어 부속건물로서 비각이 처음 세워졌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세월이 흐르면서 ‘주객전도’, 주와 객이 바뀌는 현상이 일어났다는 점이다. 본래 비각은 내부에 있는 비를 보호하기 위한 목적에서 건립된 일종의 부속건물이다. 비유컨대 보석과 보석함의 관계라고나 할까.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비각의 기능과 위상에 변화가 일어났다. 보호장치로서의 기능 외에 미적인 요소를 함께 갖춘 독립된 건축물의 한 형태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일반적으로 ‘신도비’보다는 ‘신도비각’, ‘정려’보다는 ‘정려각’이란 표현을 더 많이 사용하는 것을 보면, ‘비’ 만큼이나 ‘비각’에도 방점을 두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보석뿐 만이 아니라 보석을 담고 있는 보석함에도 중요한 가치를 부여한 셈이다.  


3) 돌로 만든 석조비각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비각은 대부분이 전통한옥을 축소해 놓은 형태의 목조비각이다. 정면 1칸, 측면 1칸의 규모에 벽체는 내부가 훤히 보일 수 있게 살대로 구성되어 있으며, 머리에는 기와지붕이 얹혀 있는 형태다. 그런데 매우 드물게는 돌로 만든 석조비각도 있다. 석조비각은 말 그대로 돌 이외에는 그 어떤 건축 재료도 사용하지 않는다. 그 형태를 보면 두 개의 돌기둥 위에 돌지붕을 얹고 그 사이에 비석을 세워놓은 형태다. 비슷한 예로 석조정려각도 있는데 이 역시 마찬가지다. 두 개의 돌기둥과 돌지붕 사이에 돌로 만든 석판 형태의 정려편액을 끼우거나, 아니면 비석을 세웠다. 이러한 형태의 석조비각은 대체로 조선후기 고종 이후에 유행한 것으로 목조비각이나 목조정려각에 비해 설치 및 유지관리에 유리하다는 장점이 있었다. 우리지역에서는 가창면 행정리 ‘송병규 효자비각’과 논공읍 금포리 ‘충주석씨 효부비각’을 예로 들 수 있다.    


4) 송병규 효자비각


달성군 가창면 행정리 마을 입구 좌우에 두 개의 비각이 있다. 좌측은 ‘경주김씨 효부비각’이요, 우측은 ‘송병규 효자비각’이다. 그런데 우측의 비각은 눈에 잘 띄지 않는다. 왜냐하면 일반적인 형태의 목조비각이 아닌 작은 크기의 낯선 석조비각이기 때문이다. 이 석조비각은 고종 때 경연관을 지낸 문익공(文益公) 만회(晩悔) 송병규(宋炳圭·1844-1912)의 효행과 충절을 기리기 위해 건립한 비각이다. 송병규는 모친의 병환에 단지주혈[손가락을 잘라 피를 줌]을 했으며,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울분을 참지 못하고 스스로 자결을 한 인물이다. 이에 조정에서 그에게 효자정려를 내렸다. 송병규 효자비각은 이러한 사실을 돌에 새긴 것으로 석조비각이자 석조정려각이라 할 수 있다. 비 전면에는 ‘효자은진송공지비(孝子恩津宋公之碑)’라 새겨져 있다.


5) 충주석씨 절부비각


달성군 논공읍 금포리 속칭 가재골 초입의 고속도로 다리 밑 금화사 입구. 이곳에 한 여인의 절부행(節婦行)을 기린 절부비각이 서있다. 1932년에 세워진 것이니 그렇게 오래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 절부비각 역시 앞서 소개한 가창 행정리의 ‘송병규 효자비각’과 함께 우리 지역에서 좀처럼 보기 드문 석조비각이다. 이곳 가재골은 예전부터 김해김씨 집성촌이었다. 이곳에 살던 김호두(金昊斗)라는 인물의 처가 비각의 주인공인 충주석씨 부인이다. 부인은 남편이 병으로 위독해지자 단지주혈을 통해 남편의 죽음을 열흘 넘게 늦추었다고 전한다. 그리고 남편 사후에는 청상[젊은 과부]으로 개가하지 않고 하나 남은 자식을 잘 키워 온 고을에 모범이 되었다고 한다. 이에 고을사람들이 뜻을 모아 절부비를 세운 것이다. 비 전면에는 ‘절부유인충주석씨비(節婦孺人忠州石氏碑)’라 새겨져 있다.      


6) 에필로그


석조비각이야기를 하다 보니 우리고장인 달서구·달성군은 정말 대구의 보물임에 틀림없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대구의 옛 모습과 옛 문화의 많은 부분을 아직까지 지키고 보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조선 말 고종 대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전형적인 형태의 석조비각은 대구권역에서는 달성군을 제외하고는 찾아보기 힘든 것이 사실이다. 참고로 위에서 소개한 2기의 석조비각은 아주 작은 규모지만 타지방을 답사하다보면 종종 제법 큰 규모의 석조비각도 만날 수 있다. 한편 최근 들어서는 비와 비각이 한 몸으로 합쳐진 일체형 석조비각이 많이 조성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현대식 일체형 석조비각은 비와 비각이 각각 분리된 전통적인 석조비각과는 완전히 다른 느낌을 주는 물건이다.


송은석 (대구시문화관광해설사) / e-mail: 316917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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