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고장 문화유적 탐방] 46. 남평 문씨 인흥(본리) 세거지 이야기(1)

입력
[2018-12-06]

1) 프롤로그


대구문화관광해설사들은 3년을 주기로 근무지를 교체한다. 2018년 올해가 근무지 교체년이다. 필자는 특수지역인 도동서원은 그대로 근무를 하고, 새 근무지로 달성군 화원읍의 남평 문씨 인흥 세거지와 인연이 닿았다. 2018년 3월 8일 목요일, 대구에서 좀처럼 보기 힘든 폭설(?)이 내리던 날, 첫 출근을 했다. 사실 그날은 폭설로 인해 근무를 하지 않아도 되는 날이었다. 하지만 새 근무지 첫 출근일인데다 눈밭 속에 펼쳐져 있을 인흥마을 설경을 생각하니 도저히 출근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폭설 속에 2시간이 넘게 걸려 도착한 인흥마을. 그날 인흥마을의 설경은 그야말로 절경 중에 절경이었다. 이번에는 모두 3회에 걸쳐 ‘남평 문씨 인흥 세거지’에 대해 한번 알아보기로 하자.


2) 남평 문씨들만 사는 마을


모든 공부는 용어를 이해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문화유적 공부 역시 마찬가지다. 특히 문화재로 지정된 유적의 경우는 먼저 문화재 지정명칭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것만으로도 내용의 대강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남평 문씨 인흥 세거지는 남평 문씨들만 사는 마을이다. 실제로 이 마을에는 모두 아홉 집이 있는데 그 구성원들의 성씨는 모두 남평 문씨다. 물론 시집온 며느리들과 외손들은 예외다. 우리나라 문씨의 본관은 감천·정선·남평 등이 있는데 이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이 남평 문씨다. 남평 문씨는 고려시대에 남평백에 오른 문다성(文多省)이라는 인물을 시조로 한다. 우리나라 성씨의 시조들 중에는 간혹 기이한 탄생설화를 지닌 경우가 있다. 남평 문씨 시조 문다성도 그 중 하나다. 세상에 알려져 있는 문다성 탄생설화는 대략 다음과 같다.


전라남도 나주의 남평 땅에 장자지(長者池)라는 못이 있었다. 어느 날 고을 군주가 못가의 한 바위 위에서 석함[石函·돌로 만든 상자] 하나를 발견했다. 함 속에는 남자아이가 있었는데 군주는  그 아이를 거두어 길렀다. 당시 석함에 붉은 글씨로 문(文)자가 쓰여 있어 그 아이는 문씨성을 얻게 되었다. 아이는 자라 5세에 문사에 통달했으며, 14세에 대사도, 18세에 대사마가 되었다. 후에 고려창업공신인 삼중대광벽상공신으로 남평백에 봉군되었다. 이를 연유로 그의 후손들은 ‘문다성’을 시조로, ‘남평’을 본관으로 삼았다.   


3) 문익점 그리고 문래와 문영


남평 문씨 인물 중 역사적으로 이름난 이로는 목화씨로 유명한 문익점[文益漸·1329∼1398]을 들 수 있다. 남평 문씨 12세로 시호는 충선(忠宣), 호가 삼우당(三憂堂)인 그는 고려의 과거시험은 물론 원나라의 과거시험에도 급제한 인물이다. 또한 서장관으로서 원나라에 갔다가 돌아올 때, 붓통 속에 목화씨 3개를 숨겨와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목화를 전파한 인물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는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건국되자 벼슬을 내려놓고 낙향하여 남은 생을 두문불출했다. 그의 호 삼우당은 ‘나라가 일어서지 못하고, 유학이 전해지지 못하고, 자신의 도가 밝지 못함을 근심 한다’는 의미다. 참고로 문익점의 손자인 문래와 문영에 얽힌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다. 문래가 목면에서 실을 뽑는 틀을 처음 만들었다고 해서 그 틀의 이름을 ‘문래’·‘물레’라고 했으며, 동생 문영은 목면에서 뽑아낸 실로 베를 처음 짰으니 그 베를 일러 ‘문영’·‘무명’·‘무명베’라고 했다는 것이다. 우리가 무심코 사용해 온 물레와 무명이라는 말에 이처럼 재미있는 유래가 숨어 있었다. 


4) ‘인흥’ 대 ‘본리’


의문이 하나 있다. 이 마을을 가리켜 어떤 이는 남평 문씨 ‘인흥’ 세거지라고 하고 또 어떤 이는 남평 문씨 ‘본리’ 세거지라고 한다. 왜일까? 대구시 민속문화재 제3호로 등록된 정식 문화재 명칭은 ‘남평 문씨 본리세거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 지역민들 사이에서는 ‘인흥’으로 불린다. 이 같은 ‘본리’와 ‘인흥’의 혼용이 생겨난 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100여 년 전인 개화기, 일제강점기를 지나면서부터였다. 당시 지방행정의 효율성을 위해 전국의 읍·면 소재지의 이름을 편의상 본리(本里)·본동(本洞)으로 개칭한 것이 원인이었다.[이를 두고 일제의 잔재라는 주장도 있다.] 현재 전국적으로 수없이 많이 있는 본리 또는 본동이라는 지명의 유래가 바로 여기에 연유한 것이다. 따라서 우리나라에서 본리·본동으로 불리는 지역들은 어쩔 수 없이 동명에 따른 혼동이 있기 마련이다. 여하튼 이곳 사람들은 ‘본리’보다는 ‘인흥’이라는 표현을 선호한다. 왜냐하면 100여 년 전부터 불리기 시작한 본리에 비해, 인흥은 무려 1,000여 년 전부터 불린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since 100년 전’과 ‘since 1,000년 전’, 더 이상 무슨 비교설명이 필요할까.


5) 한 문중이 오랫동안 대를 이어 살고 있는 땅    


세거지(世居地)라는 말이 있다. 이는 특정 성씨가 오랫동안 대를 이어 살고 있는 땅을 이르는 말이다. 우리 대구광역시에는 400-500년이 넘는 오랜 역사를 지닌 세거지가 지금도 많이 있다. 그런데 인흥마을은 세거지로서의 역사는 채 200년이 못 된다. 하지만 곧 알게 될 것이다. 인흥마을이 오랜 역사를 지닌 세거지에 못지않게 갖출 것은 다 갖춘 명실상부한 명문가 세거지라는 사실을. 세거지에는 그 마을에 처음 터를 잡은 인물이 있기 마련이다. 이를 입향조(入鄕祖)라고 한다. 지금으로부터 약 180년 전인 1800년대 초중반, 인흥리에 처음 문씨 세거지의 터를 닦은 이는 문익점의 18세손인 인산재 문경호다.


<다음에 계속>


송은석 (대구시문화관광해설사) / e-mail: 3169179@hanmail.net




푸른신문 PD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