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고장 문화유적 탐방] 42. 임하(林下) 선생을 아시나요? 금암서당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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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1-08]

지난주에 이어 이번 주에도 달성군 다사읍 매곡동 연화골에 있는 금암서당에 대해 좀 더 알아보기로 하자. 금암서당과 관련이 있는 인물은 임하 정사철과 그의 외동아들인 낙애 정광천이다. 정사철 선생은 대구지역의 성리학 계보를 논할 때 1세대로 분류되는 인물이다. 다시 말해 대구에 성리학을 본격적으로 전파한 인물이다. 과거 대구에는 선생과 관련된 유적이 여럿 있었다. 사수서실·연화재·임하초당·아금정[금암초당]·선사서당이 그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다 사라지고 연화골의 금암서당만이 남아 있다.


1) 금암사→금암서원→금암서당


우리나라 서원은 설립 직전의 유형을 보면 대체로 2가지의 경우가 있다. 하나는 특정인물을 추모하는 재실·사당이 서원으로 승격된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특정인물의 살아생전의 강학소가 서원으로 승격된 경우이다. 금암서당은 금암사(琴巖祠)라는 사당에서 출발했다. 금암사는 1764년(영조 40) 대구의 선비들이 정사철 선생의 생전 강학소였던 임하초당 터에 세운 사당이었다. 이후 1779년(정조 3)에 선생의 외동아들인 정광천의 위패를 추가로 봉안하고 제향했다. 금암사가 금암서원으로 승격된 것은 1786년(정조 10)의 일이다. 이는 지역 사림에서 올린 「서원승호사발문(書院陞號事發文)」이라는 청원에 힘입은 결과였다. 하지만 금암서원은 1868년(고종 5) 흥선 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 훼철되고 만다. 이후 90년 뒤인 1958년에 금암서당으로 격을 낮춰 복원하여 지금에 이른다.[현재 금암서당은 출입문인 삼락문(三樂門)과 강당만 복원된 상태다.] 금암서당 강당은 정면 5칸, 측면 1칸 반 규모의 홑처마 팔작지붕 건물이다. 정면에서 마주 보았을 때 좌측에서부터 2칸 방, 2칸 대청, 1칸 방이며 전면으로 반 칸 규모의 퇴 칸이 있다. 대청과 전면 기둥에는 각종 기문과 주련 등이 걸려 있다. 한편 강당 바로 앞 뜰에는 오래된 것으로 보이는 정료대가 하나 있다. 그런데 인터넷에서 이 정료대 관련하여 황당한 정보 하나를 본적이 있다. 이 정료대가 묘사에 사용하는 제수의 양을 측정하는 도구라고 소개되어 있었다. 정료대 위에 올라갈 수 있는 양만큼을 묘사의 제수로 사용한다는 내용인데 영 신뢰가 가지 않는다. ‘팩트 체크’가 필요하다. 물론 서원문화를 아는 이라면 이런 가짜뉴스에 속아 넘어가지는 않을 터이지만. 이 물건은 서원의 조명시설로서 관솔불을 밝혔던 정료대(庭燎臺)가 맞다.


2) 적멸보궁 금암서당


금암서당이 자리한 연화골은 명실상부한 동래 정씨 임하공파의 성지라 할 수 있다. 이유인즉슨 서당 바로 뒤 연화산 자락에 임하, 낙애 양 선생의 묘를 비롯한 문중 선영이 있기 때문이다. 선영 초입에 ‘임하·낙애 양세정선생 유적비’가 있으며, 그 곁에 ‘낙애선생매판소’ 표지석과 ‘양세임란창의비’ 등이 있다. 전자는 서원철폐 때 낙애 선생의 위패를 묻은 곳을 표시하는 표지석이며, 후자는 부자가 모두 임진왜란 때 의병으로 활략했음을 알리는 표지석이다. 한편 이곳이 문중 성지로 불리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금암서당과 바로 뒤편에 있는 선영이 자연입지적·건축학적으로 절묘한 조합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예전에 금암서당 답사를 갔다가 실제로 경험한 일이다. 당시 첫 일정은 임하, 낙애 양 선생의 묘소 참배였다. 하지만 답사 당일 비가 많이 내린 관계로 묘소에서의 참배는 포기하고 금암서당에서 대신하기로 했다. 그때 아주 흥미로운 사실 한 가지를 알게 되었다. 금암서당 대청의 뒷문을 개방하니 그 열린 공간으로 양 선생의 묘소를 비롯한 선영 전체가 한눈에 다 들어오는 것이었다. 당시 한 문중원이 다음과 같이 설명을 했다. 물론 웃으면서 농으로 하는 이야기였지만 필자는 정말 의미심장하게 받아들였다. 
‘여러분! 불가에서 말하는 적멸보궁을 잘 아시지요?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봉안되어 있기 때문에 법당 안에 불상을 모실 필요가 없는 적멸보궁 말입니다. 대표적으로 양산 통도사가 그렇지요. 불상이 있어야 할 자리에 불상은 없고 그 뒤편으로 대형유리창만 있잖아요. 그 창 너머로 진신사리가 봉안된 금강계단이 보이죠. 이곳 금암서당이 그렇다는 겁니다. 우천으로 강당 대청에서 망배(望拜)를 올리지만 창 너머로 선조의 묘소가 훤히 보이니까요.’


3) 부전자전(父傳子傳), 낙애 정광천


그 아버지의 그 아들이었다. 정사철 선생의 외동아들인 낙애 정광천은 대구 성리학 2세대 그룹의 선두주자였다. 동시에 임진왜란 때는 하빈의 남면을 책임지는 의병장을 역임했으며, 망우당 곽재우와 함께 화왕산성 전투에 참여하는 등 많은 공을 세웠다. 또한 그는 임란 당시의 처참했던 상황을 기록한 『용사일기』와 『조간일록』을 남기기도 했다. 그는 시조에도 능해 「술회가」 6수와 「병중술회가」 3수를 남겼는데, 부모에 대한 효심을 잘 표현한 시로 알려져 있다. 연화산 선영 그의 묘소에는 충과 효를 문학적으로 잘 승화시킨 그의 문학가적 위상을 기리는 ‘낙애시비’가 세워져 있다.


4) 에필로그


‘임하 숲속은 고요하여 옛 부터 속된 사람 없고, 덧없는 세상엔 사이비 선비 우글우글 하도다. 그윽이 사는 재미 말하자면, 오직 제자들의 학문이 날로 새로워지는 것뿐이라네.’ (정사철)
‘숲속엔 지금 주인 있어, 몇 채의 초가를 꾸려 사는 참 선비라네. 티끌 세상일에 관여 않고, 풍류로 자연과 더불어 늙어간다네.’ (정광천)
금암서당이 금암서원으로 세상에 다시 빛을 드러내는 그날이 어서 빨리 돌아오기를 기대해본다. 


송은석 (대구시문화관광해설사) / e-mail: 316917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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