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고장 문화유적 탐방] 36. 그곳에 미스터리(?)한 영정이 있다, 금회영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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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9-20]

1) 프롤로그


‘사육신(死六臣)’은 조선시대 충신의 표상이다. 12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가 15세에 숙부인 세조에 의해 죽임을 당한 단종. 바로 그 비운의 임금 단종의 복위를 위해 목숨을 바친 여섯 신하가 사육신이다. 그런데 1970년대 후반 갑자기 ‘사칠신(死七臣)’이라는 말이 세상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이 논의의 중심인물은 ‘백촌 김문기’ 선생이었다. 우리가 살고 있는 대구에는 김문기 선생을 추모하는 재실이 세 개가 있다. 북구 노곡동의 ‘경의재’, 달서구 신당동의 ‘모암재’, 다사읍 세천리의 ‘모의재’가 그것이다. 그런데 이 외에도 선생의 영정을 봉안한 추모시설이 한 개 더 있다. ‘금회영각’이다. 이름도 생소한 이곳은 대체 어떤 곳일까?


2) 모의재와 금회영각(琴回影閣)


백촌 김문기 선생은 1456년 사육신 사건 때, 사육신들과 마찬가지로 세조에 의해 3대가 멸족되는 참화를 당했다. 이 일로 선생의 일족들은 혹시라도 있을지 모를 화를 피해 전국 각지로 흩어졌다. 우리 대구에도 이들의 후손들로 이루어진 3개 파의 김령 김씨 문중이 있다. 성서 신당동 모암재를 중심으로 하는 신당파, 노곡동 경의재와 태충각을 중심으로 하는 노곡파, 세천리 모의재와 금회영각을 중심으로 하는 세천파(世川派)가 그것이다. 이중 이번 이야기의 주인공인 금회영각은 세천파를 대표하는 랜드마크라 할 수 있다.

금회영각은 최근 세천산업단지가 들어선 대구광역시 달성군 세천리에 있다. 금회는 말 그대로 ‘금호강물이 돌아나간다’는 뜻이고, 영각은 영정이 봉안된 전각을 말한다. 실제로 세천리는 북·서·남 세 방향이 금호강물에 막혀 있다. 다시 말해 금호강물이 3시 방향에서 들어와 반시계 방향으로 세천리를 휘감고 돌아 6시 방향으로 빠져나가는 이른바 물돌이 형국이란 말이다. 마치 안동의 하회마을이나 예천의 회룡포처럼.  
김령 김씨 세천 문중은 김문기 선생의 8세손인 미정 김세철이라는 인물을 입향조로 한다. 그는 본래 충북 옥천 사람이었다. 호방한 성격에 시를 좋아한 그는 평소 천하주유를 즐겼다고 한다. 그러던 중 세천리의 풍광에 반해 이곳에 정착을 했다고 하니 대략 300년 전의 일이다. 한편 김세철의 5세손에 독재 김종성이라는 인물이 있었다. 그는 일찍이 연재 송병선·심석재 송병순 양선생의 문하에서 수학했으며, 단종 능인 장릉 참봉을 역임하기도 했다. 그는 자신의 선조인 김문기 선생을 추모하기 위한 시설로 세천리에 모의재(慕毅齋)라는 재실을 지었다. 1893년에 지어진 모의재는 충의공을 사모한다는 뜻으로 충의는 선생의 시호이다. 또한 그는 1900년에 세천과 신당의 두 김령 김씨 문중의 뜻을 모아 모의재 곁에 선생의 영정을 모신 금회영각도 지었다.


3) 거참! 알다가도 모를 영정 속 미스터리

김령 김씨 문중에서 전하는 바에 의하면 이 영정은 1451년(문종 1)에 선생이 함길도 관찰사로 있을 때 그려진 것이라고 한다. 화가는 중국 사람인 대기거사(大奇居士) 공손급(公孫及)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그 무자비했던 사육신사건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선생의 영정이 어떻게 보존될 수 있었을까?


1456년(세조 2) 사육신사건으로 선생이 참화를 당하자, 선생의 제자들은 세상 사람들 몰래 선생의 영정을 땅 속에다 묻었다. 그리고 수 백 년의 세월이 흘러 영조 대에 이르러 선생은 신원복관이 되었고, 선생의 영정은 다시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영정이 금회영각에 봉안될 수 있었던 것은 정조 시절 선생의 14세손인 김치종의 건의가 조정에 받아들여졌기 때문이었다. 참고로 당시 경상도 관찰사 주관 하에 거행된 금회영각 영정 봉안 의식은 아주 성대하게 치러졌다고 한다.


모의재와 금회영각은 한 울타리 안에 있다. 마치 서원에서의 강당과 사당처럼 강당에 해당하는 모의재와 사당에 해당하는 금회영각이 각각 서쪽과 동쪽에 자리하고 있다. 특별히 금회영각은 솟을 내삼문을 갖춘 별도의 담장 안에 있는데, 건물에 단청을 입히는 등 나름 추모공간으로서의 격을 잘 갖추고 있다. 참고로 솟을 내삼문의 가운데 문 상부에는 선생에게 내려진 충신정려와 관련된 편액(1904년) 하나가 게시되어 있다. 그런데 금회영각에 봉안된 선생의 영정에는 다음과 같은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가 있다.


유건의 끈이 풀어져 있다.(선비가 유건을 머리에 쓴 이상 끈을 묶지 않고 늘어뜨려 놓을 이유가 없다.)
공수한 손을 보면 오른 손이 위로 올라와 있다.(남자의 공수는 왼손을 위로 하는 것이 예법에 맞다.) 
보통 영정 속 인물들은 의자에 앉은 모습이 많다. 하지만 이 영정 속 인물은 무릎을 꿇고 앉아 있다.


필자가 이 영정을 처음 본 것은 2013년 가을이었다. 하지만 지금까지도 이 의문은 여전히 해결이 되지 않고 있다. 문과급제에 한림벼슬을 거쳐 공조·이조판서, 함길도 관찰사·함길도 도절제사와 삼군도진무에까지 오른 백촌 김문기 선생. 도대체 영정 속 선생의 이 어색한 모습을 어떻게 이해해야할까?


4) 에필로그


신화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머리를 좀 굴려야 한다. 이야기의 행간에 숨어 있는 상징을 읽어내든지, 아니면 상상의 나래를 펼 수 있어야 신화라는 바다를 무사히 헤쳐 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가끔은 신화도 아닌 것이 마치 신화인양 상징을 읽어 내거나, 상상력을 발휘해야만 접근이 가능한 경우가 있다. 이번에 우리가 만난 백촌 김문기 선생의 영정이 바로 그러하다.


송은석 (대구시문화관광해설사) / e-mail: 316917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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