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고장 문화유적 탐방] 35. 천년만년 제사를 받들다, 이익필 불천위사당

입력
[2018-09-13]

1) 프롤로그


‘불천위’ 혹은 ‘부조위’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는지? 유가에서는 흔히 사용하는 용어지만 현대인들에게는 매우 낯선 용어이다. 그래서 종종 실수가 있다. 이를테면 불천위 관련하여 상대에게 메시지를 전달했는데 상대가 불천위를 모르고 있었을 경우가 그러하다. 사실 예전에는 필자도 이런 실수를 종종 한 적이 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대화에 있어 눈높이 맞추기와 상대에 대한 배려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번 이야기의 주제는 ‘불천위 사당’이다. 지난번 하목정에 이어 하목정 바로 뒤편에 있는 전양군 불천위 사당에 대해 알아보기로 하자.


2) 대대손손 사당에 모셔두고 제사를 받드는 신주, 불천위


‘4대봉제사’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4대에 걸친 선조의 제사를 받들어 모신다는 뜻이다. 여기에서 4대라 함은 나로부터 위로 거슬러 올라가면서 4대를 말한다. 1대조인 부모, 2대조인 조, 3대조인 증조, 4대조인 고조가 그것이다. 그런데 왜 3대, 5대가 아닌 4대봉제사일까? 사실 옛날에는 ‘2대봉제사’도 있었고, 3대, 4대, 5대, 6대, 7대 심지어는 ‘9대봉제사’까지도 있었다. 이러한 봉제사 대상의 변천과정을 알기 위해서는 지금으로부터 무려 2,500여 년 전 고대 중국의 예법을 참고해야 한다.
아주 오래된 중국의 옛 예법에 의하면 천자는 시조, 6대조, 5대조, 4대조, 3대조, 2대조, 1대조에 이르는 7대 선조를 대상으로 사당 일곱 개를 지어 제사를 지내고, 제후는 5대조, 대부는 3대조, 선비는 2대조, 평민은 1대조에 한해 사당 없이 안채에서 제사를 모신다고 되어 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는 어떠했을까? 참고로 우리나라는 국법에 의해 고려시대와 조선전기에는 각각 신분에 따라 봉제사 대수를 달리했다. 하지만 조선 중후기 『주자가례』가 정착되면서부터 신분에 따른 차이 없이 4대봉제사가 유행하기 시작하여 현재에 이른 것이다. 그런데 눈치 빠른 이라면 여기에서 한 가지 의문점을 발견할 수 있다. 4대를 넘긴 제사는 어떻게 할 것이며, 그 신주는 또 어떻게 할 것이냐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서 ‘불천위’와 ‘매주·조매·조천·체천’이 나눠진다.
4대봉제사를 행하는 사당에는 1대조부터 4대조까지의 신주가 모셔져 있다. 그런데 만약 새로운 신주가 사당에 들어가야 할 상황이 벌어진다면, 기존 사당의 신주에는 어떤 변화가 있을까? 답부터 먼저 말하면 기존 신주들은 각각 한 대씩 승격한다. 새 신주가 기존의 1대조 자리에, 1대조는 2대조 자리에, 2대조는 3대조 자리에, 3대조는 4대조 자리로 말이다. 그렇다면 기존 4대조의 신주는 어떻게 될까?
4대조 신주는 대체로 3가지 방법에 의해 처리된다. 산소 곁에 신주를 묻는 ‘매주·조매’, 4대손 안에서 가장 항렬이 높고 나이가 많은 이의 집으로 신주를 옮기는 ‘체천·조천’, 신주를 사당 안에 그대로 두고 대대손손 제사를 모시는 ‘불천위·부조위’가 그것이다. 그런데 이중에서 불천위가 되는 일은 매우 힘들다. 대개는 한 종족의 시조나 중시조 또는 국가에 큰 공훈을 세운 경우에만 불천위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종가(宗家)·종손(宗孫)이라고 칭하는 것이 바로 이 불천위 제사를 받들어 모시는 집과 그 집의 장손을 이르는 말이다. 


3) 전양군 하옹 이익필 


이익필의 본관은 전의, 자는 문원, 호는 하옹(霞翁), 시호는 양무이다. 어려서부터 기골이 장대하여 대장부의 기질이 있었는데, 종종 귀신의 실상을 확인하기 위해 늦은 밤 사당을 지키기도 했다고 한다. 1703년(숙종 29) 무과에 급제했으며, 1728년(영조 4)에 충청도에서 이인좌의 난이 일어나자, 그는 금위우별장으로 도순무사 오명항과 좌별장 이수량 등과 함께 난의 진압에 앞장서 안성과 죽산 등지에서 큰 공을 세웠다. 당시 난을 평정하고 개선할 때 영조 임금이 직접 남대문까지 나와 손수 술잔을 건넸다고 한다. 이때의 공으로 ‘수충갈성양무공신 3등’에 오르고, ‘전양군’에 봉군되었다. 이후 전라 병사, 평안 병사 등을 역임하고 고향의 하목정으로 돌아와 만년을 보냈다. 향년 78세로 졸하였는데 사후에 병조판서에 추증되고, ‘양무’라는 시호가 내렸다. 특히 그는 영조로부터 각별한 총애를 받았는데 『조선왕조실록』에 그에 대한 기사가 많이 등재되어 있다.
전양군 이익필의 불천위 사당은 하목정 뒤편에 있다. 이 사당이 처음 세워진 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250년 전인데, 창건 당시의 모습이 지금까지 그대로 전해져오고 있다. 사당은 정면 3칸·측면 1칸 반 규모의 겹처마 맞배지붕 건물로 전면으로 전퇴[빈 공간]를 두고 있다. 한편 사당 앞뜰에는 수령 200~300년은 족히 넘어 보이는 배롱나무가 여러 그루 심겨져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사당 뜰에만 서면 자꾸만 이 배롱나무쪽으로 눈이 간다. 아마도 수 백 년 세월 동안 사당을 지키고 있는 배롱나무 고목에서 풍기는 묘한 기운 탓이렷다.


4) 에필로그


풍광 좋은 곳에서 시인묵객이 많이 나는 법이다. 그래서일까. 하빈 일원의 경치 좋은 낙동강가에 세거하고 있는 전의 이씨 문중은 예술적 감각이 뛰어났던 것 같다. 하목정을 지어 수많은 시인달사들을 불러 모았던 낙포 이종문. 이종문의 아들로 이 지역 최고의 누정으로 이름났던 ‘부강정’을 경영한 다포 이지화. 그리고 이종문의 현손으로 「하목정16경」을 짓고, 하목정 뒤 불천위 사당에 혼을 의지하고 있는 하옹 이익필. 이들의 면면을 살펴보니 그러한 것 같다.    


송은석 (대구시문화관광해설사) / e-mail: 3169179@hanmail.net



푸른신문 PD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