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고장 문화유적 탐방] 27. 비슬산의 자연환경과 불교문화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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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7-12]

1) 비슬산신 정성천왕, 정성대왕


동서고금을 불문하고 인류는 명산대천에 신성을 부여했다. 그리스로마신화를 봐도 그렇고 우리나라의 신화를 봐도 그렇다. 예를 하나 들어보자. 가야신화는 크게 두 유형이 있다. 하나는 김수로왕이 등장하고 다른 하나는 가야산신인 ‘정견모주’가 등장한다. 그런데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본래 가야산신이었던 ‘모주’가 불법을 수호하는 불교의 신 ‘정견모주’로 등장한다는 점이다. 이 점에서는 앞서 대견사 편에서도 잠깐 언급했다시피 비슬산도 마찬가지다. 신라·고려시대 때 비슬산신을 정성천왕이라 칭했는데, 정성천왕 역시 불법을 수호하는 불교의 신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선시대에 와서는 정성천왕이 ‘정성대왕’으로 바뀐다. 조선의 숭유억불 정책에 따라 신의 성격과 이름이 바뀐 것이다. 다시 말해 신라·고려 시대 때 불교의 신이었던 정성천왕이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정성대왕이라는 이름의 비슬산신 혹은 성황신이 되어 지금까지 그 신격을 이어오고 있는 것이다.
  
2)의상대사의 화엄십찰, 옥천사


지금으로부터 약 1,300년 전, 당나라 유학길에 올랐던 원효와 의상. 그러나 이 두 스님은 이른바 ‘해골물’ 사건을 겪으면서 서로 다른 선택을 한다. 원효는 유학을 포기했고, 의상은 유학을 선택했다. 이 중 당나라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의상은 우리나라 화엄종의 시조가 되었고, 신라 땅에는 화엄의 법을 전하는 화엄십찰이 세워졌다. 최치원의 『법장화상전』과 일연의 『삼국유사』에 화엄십찰이 나오는데, 비슬산 옥천사는 이 두 기록에 모두 등재되어 있다.
옥천사에 대해서는 조선 후기의 유학자인 김진규의 『죽천집』 「비슬산 용천사 고적기」에 잘 나타나 있다. ‘의상이 처음 절을 창건할 때의 이름은 옥천, 일연이 중수할 당시의 이름은 용천이었는데, 다시 불일로 바꿨다.’는 대목이 그것이다. 현재 비슬산 동쪽 청도군 각북면에 있는 용천사를 이 옥천사로 보고 있다.
화엄십찰은 신라왕실과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화엄십찰 중 한 곳인 옥천사가 자리한 비슬산은 신라 왕실과 신라의 호국불교라는 측면에서 매우 중요한 산이었음을 알 수 있다. 참고로 화엄10찰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10산(山) 12사(寺)이다.


3) 포산이성(包山二聖)과 포산구성(包山九聖)


『삼국유사』 피은편에 「포산이성」이라는 이야기가 실려있다. ‘피은’은 세상을 피해 은거한다는 뜻이고, ‘포산이성’은 포산의 두 성자라는 뜻이다. 포산은 현풍의 옛 이름이다. 
신라시대 때 비슬산에 관기와 도성이라는 인물이 있었다. 관기는 비슬산 남쪽의 관기봉에, 도성은 비슬산 북쪽 천왕봉 아래 도성암에 살았다. 두 사람은 도력이 높았는데 예를 들면 이렇다. 관기가 도성을 부르려고 하면 산의 나무들이 북쪽을 향해 줄기가 구부러지고, 반대로 도성이 관기를 부르려하면 나무들이 남쪽을 향해 줄기가 굽었다는 식이다. 그러던 어느 날 두 사람은 비슬산에서 사라졌다. 사람들은 그들이 부처가 되었다고 믿었다. 지금도 비슬산 북쪽 천왕봉 아래에는 도성암이 있고, 남쪽 관기봉 아래에는 암자 터가 남아 있다.
한편 ‘포산구성’도 있다. 포산이성인 관기·도성에다 ‘반사·첩사·도의·자양·성범·금물녀·백우’ 7명을 더해 포산의 아홉 성인, 포산구성이라 하는 것이다. 본래 포산구성에 대한 기록이 전해졌는데, 일연 스님 당시에 이미 많은 부분이 사라졌다고 한다.


4) 일연, 35년 간 비슬산에 주석


『삼국유사』를 편찬한 일연 스님은 35년이라는 긴 시간을 비슬산에서 보냈다. 이에 대해서는 군위 인각사의 「보각국사비명」에 잘 나타나 있다. 스님은 22세에서 44세까지 22년간을 비슬산의 보당암·무주암·묘문암 등에서, 59세에서 72세까지 13년을 역시 비슬산 인흥사·불일사에서 주석했다. 여기에다 사족을 하나 달면 승과에 장원급제한 스님의 첫 부임지도 비슬산 묘당암이었다. 이후 정림사·길상암·선월사·오어사·운문사·광명사·인각사 등에도 주석을 했지만, 35년간을 비슬산에서 주석했다는 것은 분명 상징하는 바가 크다. 스님은 세속의 나이로는 84세, 스님으로서는 71세를 살았다. 따라서 스님으로서의 삶 중 절반이 넘는 세월을 비슬산에서 보낸 셈이다. 이러한 까닭에 『삼국유사』의 기획·기초자료조사·전체적인 얼개 등 편찬 작업의 상당 부분이 비슬산에서 이뤄졌을 수도 있다는 주장이 나오는 것이다.


5) 진신사리가 모셔진 적멸보궁, 용연사


스님들의 다비식 이후 수습된 작은 구슬 알갱이처럼 생긴 물질을 사리라고 한다. 그중에서도 석가모니 부처의 몸에서 나온 사리를 특별히 ‘진신사리’라 한다. 신라시대 때 자장율사가 당나라에서 가져와 양산 통도사에 봉안한 진신사리가 있었다. 그 중 하나가 임진왜란 당시 우여곡절을 거치면서 비슬산 용연사로 옮겨졌다. 이 때 진신사리가 모셔진 시설물이 현재 보물 제539호로 지정된 ‘용연사 금강계단’이다. 참고로 이때의 계단은 오르내리는 계단(階段)이 아니다. 스님들이 계(戒)를 받는 단(壇)을 말한다.


6) 에필로그


비슬산은 계절마다 아주 색다른 모습으로 사람들을 맞이한다. 봄이면 분홍 참꽃, 여름이면 시원한 계곡, 가을은 억새, 겨울은 얼음동산 하는 식이다. 또한 토르와 암괴류 같은 기암괴석을 비롯해 골짜기 마다 들어 앉아 있는 유서 깊은 절집들. 올여름 한 번쯤은 비슬산을 다녀가 보라. 왜 다들 ‘북팔공, 남비슬’이라 하는지 알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참고자료: 디지털달성문화대전]


송은석 (대구시문화관광해설사) / e-mail: 316917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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