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고장 문화유적 탐방] 18. 서재마을이라 불리는 까닭, 용호서원(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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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10]

1) 프롤로그


대구의 서쪽 금호강 경계에 ‘서재’라는 지역이 있다. 이십여 년 전만해도 서재는 대구시민들에게 있어 낯선 지역이었다. 서재는 동·남쪽과 서쪽이 각각 와룡산[299m]과 궁산[또는 궁미산·252m]으로 막혀 있으며, 북쪽은 금호강으로 막혀 있다. 다시 말해 동·서·남은 산, 북은 물로 막혀 있는 지형이다. 따라서 지금과는 달리 예전의 서재는 이른바 육지 속의 섬마을이었다. 이번에는 2회에 걸쳐 이곳 서재에 있는 용호서원에 대해 한 번 알아보기로 하자.


2) 성주 도씨 제일 큰집, 서재계 용호문중


우리나라의 도씨는 성주를 본관으로 하는 성주 도씨만 있다. 성주 도씨의 비조[시조보다 윗대의 조상]이자 득관조[본관을 처음 얻은 조상]는 고려개국공신으로 알려진 ‘도진’이라는 인물이다. 그는 고려 태조가 후삼국을 통일할 당시 팔거현[지금의 대구 칠곡] 지역의 토성 호족장으로 통일대업에 공이 있었다. 이에 태조는 도진에게 벼슬과 함께 칠곡부원군에 봉하고, 팔거현을 식읍으로 하사했다. 참고로 팔거현은 신라시대 대구지역에 해당하는 수창군의 4현 중 하나인데, 대구현·팔거현·하빈현·화원현이 당시의 4현이었다. 팔거현은 고려조에서 경산부[지금의 성주]의 속현이 되었다가 조선조에서는 칠곡도호부로 승격되었다. 성주라는 본관은 1752년(영조 28) 처음으로 족보를 편찬할 당시, 팔거현이 성주목에 소속되어 있었기에 팔거가 아닌 성주를 본관으로 삼은 것이다. 이러한 연유로 성주 도씨를 옛날에는 ‘팔거 도씨’·‘칠곡 도씨’ 등으로도 불렀다. 이렇듯 팔거지역의 호족이었던 성주 도씨는 이후 세가 확장됨에 따라 32개 파로 분파되었다. 이중 큰집인 대구파는 다시 22개 파로 분파되었으며, ‘서재계’와 ‘서촌계’가 대표적이다. 서재마을의 성주 도씨는 다른 말로 용호문중·서재계·백파 등으로도 불리는데 이른바 우리나라 성주도씨 대종파, 곧 ‘제일 큰집’이다. 참고로 성주 도씨의 시조는 고려에서 전리상서를 지낸 ‘도순’이라는 인물이다.


3) 서재 세거 470여년, 입향조 도흠조


과거 팔거로 불렸던 칠곡에서 지금의 서재로 처음 입향한 성주 도씨 인물은 ‘도흠조’이다. 그는 성주도씨 16세 대종손으로 자는 경선, 칭호는 그의 벼슬에 의거하여 ‘우후공’이라 불린다. 그가 서재로 입향한 시기는 지금으로부터 약 470여 년 전인 1540년대로 추정하고 있다. 당시 팔거현이 퇴락하자 그는 문중을 다시 일으켜 세울만한 좋은 터를 찾아 이거를 계획했다. 그는 3곳의 후보지인 고령의 상곡, 성서의 제벌, 하빈의 도촌 중에서 ‘도촌’을 선택했다. 그가 도촌을 선택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었을 것이다. 이를테면 팔거에서 남쪽으로 금호강만 건너면 바로 도촌이다. 따라서 도촌은 다른 두 곳에 비해 팔거와의 거리가 가깝다는 장점이 있다. 그리고 도촌은 금호강과 함께 와룡산을 끼고 있어 산수와 문물이 아름답고 풍요로운 지역이다. 게다가 흥미롭게도 입향 당시 이곳의 지명이 도씨와 음이 같은 ‘도촌(島村)’이었다는 점이다. 앞서 잠깐 언급했지만 과거 이 지역은 산과 물로 둘러싸여 세상과는 격리된 지역이었다. 그래서일까. ‘섬도(島)’, 도촌이었다. 도촌은 성주 도씨가 입향한 이후 도씨들이 살고 있는 마을이라는 의미로 ‘도촌(都村)’이라 불리기도 했다. 이후 도촌은 서재(鋤齋)라는 호를 사용한 도여유라는 인물의 등장으로 세상 사람들로부터 ‘서재공 마을’ 또는 ‘서재’로 불렸고, 지금까지 470여년의 세월동안 성주 도씨 대종파 세거지로서의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4) 동산에 올라 서재 땅을 굽어보다, 용호서원


서원의 시작에는 대체로 두 가지 유형이 있다. 하나는 특정 인물의 생전 강학소가, 다른 하나는 특정 인물을 기리는 사당이나 재실이 서원으로 승격되는 예이다. 용호서원은 사당에서 출발했다. 1704년(숙종 30)에 세워진 세덕사가 그것이다. 이후 1708년(숙종 34)에 용호서원(龍湖書院)으로 승격되었다. 용호라는 서원명은 인근의 와룡산과 금호강에서 각각 한자씩을 취한 것이라고 한다. 용호서원은 1868년(고종 5) 흥선 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 훼손되었고, 이후 용호서당으로 유지되다가 1984년에 중수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하지만 아직까지 사당은 짓지 못한 상태이다. 참고로 과거 용호서원 시절에는 사당을 용호사라 칭했으며, ‘양직당 도성유·서재 도여유·지암 도신수’ 3위를 제향했다. 지금의 용호서원은 정문인 입덕문과 강당만을 갖추고 있다. 입덕문 바깥에는 제법 넓은 빈터가 있는데 용호서원 옛터이다. 현재 이곳에는 이 터에 과거 용호서원이 있었음을 알리는 ‘용호서원유적비’가 세워져 있다. 또한 용호서원 입구 산길어귀에는 3인의 열부를 기리기 위한 정려각인 정렬각이 있다. 이 정렬각은 조선후기 조정에서 내린 각기 다른 3개의 정려각을 하나로 합쳐 놓은 것이다. 효부이자 열부로서의 부덕을 보인 성주도문의 세 며느리인 ‘아주 신씨·월성 최씨·순천 이씨’ 부인이 정렬각의 주인공이다.


5) 성주 도씨의 귀의처 치경당


현재 서재마을 중심에는 동산이라 불리는 작은 산이 있다. 이 산 남쪽 사면에 용호서원과 치경당(致敬堂)이 위아래로 인접하여 자리하고 있다. 치경당은 현재 묘소가 전해지지 않는 성주 도씨 시조 ‘도순’, 대구파조인 3세 ‘도유도’, 성주파조인 3세 ‘도유덕’ 3위를 추모하는 공간이다. 따라서 치경당은 우리나라 성주 도씨의 혈연적 뿌리이자 귀의처가 되는 매우 중요한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다음에 계속)


송은석 (대구시문화관광해설사) / e-mail: 316917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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