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배요 그 세월을 우에 살았능교?_제4화 쌍팔년도 Ⅲ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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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1-09]


1955년 당시 대구시내에는 시에서 운영하는 시영버스가 있었다. 일차순환선 내에서만 운행했는데, 요금은 학생이 15원 이었다.
비오는 날이 아니면 대부분의 학생들은 걸어 다녔다. 어떤 여학생의 별명이 20원짜리가 있었다. 엉덩이가 남보다 너무 커서 버스 자리를 많이 차지한다고 붙인 별명이란다.
그 당시의 대구시가지는 지금보다 훨씬 좁았고 중고등학교 숫자도 적었다. 거기에다가 학교들은 권역별로 모여 있었기에 우리 학생들이 많이 다니는 통학로는 거의 정해져 있었다.
대신동에서 약전골목을 거쳐 삼덕동으로 가는 길이 가장 붐볐다. 이 길로 다니면 여러 학교의 친구와도 서로 만나고 많은 소식도 들을 수 있었다.
각 학교에는 그룹 이라는 게 생겼는데, 취미나 학습 동아리가 아닌 폭력대항 조직 같은 것이었다. 당연히 리더가 있고 물주(物主)가 생기고 구성원이 모였다. 이 그룹은 이름도 멋지게 잘 붙여야 했고 구성멤버가 또한 탄탄해야 했다.
이 그룹 멤버는 절대로 약자를 괴롭히는 이지메(집단 괴롭힘) 같은 것은 하지 않았으며, 내성적이며 쭐리던 학생도 오히려 이 조직에 가입하면 어깨를 펴고 자신감을 갖게 되는 좋은 점이 있었다.
뒷골목 악소배(惡小輩)들처럼 삥이나 뜯는 치사한 행동은 전혀 없었다. 의리와 명예를 중시하는 멋쟁이 예비 청년신사들이었다. 그룹 활동을 보면 가끔 학기말 시험 전에 합숙하며 공부를 하자고 모이긴 했지만, 여학생 팀과 연결이라도 되면 바로 책은 던져버리고 빵집으로 달려갔다. 먹고 떠들고 까불고 떼 지어 극장 구경까지 갔다가 시험은 쩔쩔매고 했다.
여학생들과의 그룹 미팅은 아무래도 봄방학 기간 중에 많았는데, 각자 헌책을 팔아 용돈이 생겼기 때문이다.
다른 학교의 그룹소식도 관심 있게 서로 듣기도 했는데 어떤 학교에서는 그룹끼리 세력다툼을 하다가 집단 싸움이 벌어졌고, 칼을 소지한 학생은 적발되어 일주일 정학 처분까지 받았다는 소문이 있었다.
자기 그룹에 대한 평이 나빠지면 학교 훈육주임의 관심대상이 될 수 있기에 더욱 조심했다. 그래도 학생들 사이에서는 그룹원이 되면 부러움과 주목의 대상이 되기에 가입 하려고 애섰다.
남자학교에는 소위 주먹 짱 이라는 가다(型)가 있었는데, 그 학교의 첫째가는 총가다가 있고, 둘째, 셋째 차례로 서열이 매겨지는 가다들이 있었다. 일학년 신입 가다는 미래의 경쟁 대상 인물이었다.
신학기 초에는 이런 딴딴한 놈을 서로 자기 그룹에 끌어넣으려고 경쟁도 심했다.
그러나 이런 가다들보다 더 선망의 대상이 되는 가다가 있었으니 바로 공부 잘하는 수재들이다.
이 공부 잘하는 학생들은 학교 선생님에게서나, 같은 학생들 끼리나, 사회에서나, 누구나 아끼고 인정받는 스타그룹이다.
1953년에 문교부에서 시행한 ‘전국학술경시대회’가 있었는데, 이 시험에서 대단한 성적을 낸 학교가 우리 대구에서 나왔다. 교육수도라고 자처하던 우리 대구의 명예를 지킨 것이다.
이 시험에 우수한 성적을 낸 학생 이름은 신문에 나고 길거리를 걸어가도 “저 학생이다. 이번에 전국 일등 한 학생이 바로 저 학생이다” 사람들의 부러움과 칭찬을 얻게 되었다.
당시는 학교 입학시험을 특차와 1차, 2차 순으로 차례로 날짜를 정해 시험을 치렀는데, 특차 학교인 이 학교의 입학 경쟁률은 20:1을 넘었다. 각 국민학교에서 반 수석은 되어야 응시할 정도로 어려운 경쟁이었다.
그럼 이 글을 쓰는 할배는 우째? 그리 잘 아시느냐고? 허참, 나도 거기 있었다고 밖에 대답할 수 없겠군요.
중고등 학생의 교모(校帽)는 채양(遮陽)이 붙은 둥근형인데 색깔은 곤색이나 검은색이었고 교복도 곤색이나 검정색이었다.
목 칼라에는 팻치(빳찌)가 붙어있었고, 학년표시도 있었다.
남학생 교복엔 왼쪽 가슴부위에 명찰이 새겨져 있었다.
모표는 그 학교의 상징인데 전통이 오래된 학교의 모표는 시민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었다.
그래서 모표만 봐도 어느 학교 학생인지 알 수 있었다. 또 학교마다 자랑하는 교가(校歌)가 있었는데, 남의 학교 학생들까지 이 노래를 알았고 불렀다.
학교에는 대대장 생도가 있었는데 이 학도 호국단 조직은 먼 훗날 교련복을 입는 단계로까지 발전했다.
그 시절엔 또 시가행진이 종종 벌어졌는데, 이름 있는 국경일에는 각 고등학교에서 칠성동 종합운동장에 모여 합동 기념식을 가졌다. 기념식이 끝나고 나면 시가행진에 들어갔다. 행진코스는 역 지하도를 지나서 중앙통은 필수코스이고 반월당 또는 명덕로타리 쯤에서 각 학교 방향으로 갈라지게 된다.
이 행렬의 맨 앞에는 말을 탄 학생기마대가 달리고 그 뒤로 남자고등학교와 여자고등학교 순으로 가게 된다.
각 학교마다 악대부가 요란한 북 나팔소리를 내며 앞서가는데 맨 앞에 악장이 지휘봉을 들고 행렬을 이끌고 있다. 이 악장이 인기의 초점이다. 花心이다.
그 중에도 S여고 악대부 악장은 소문났다.
너무 잘난 이 악장은 번쩍이는 휘장을 어깨에 달고 지휘봉을 착착 꺽으며 선도에서 나가는데, 따라가는 짧은 주름치마 하얀 종아리…
아 ~ 빛나는 햇살아래 그 모습 ~ 그 느낌… 많은 세월이 갔어도 우리들의 가슴에 남겨진 멋진 장면이었다.
전쟁 후 모두가 가난하고 초라하던 시절이었지만 젊은 우리 학생들의 가슴에 그나마 간직하게 된 한 컷의 소중한 로망이었다.


東伯  조영창(趙永昌) 달서구문화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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