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채한의 사통팔達] ‘광인들의 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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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08]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에 걸려있는 히에로니무스 보쉬(1450-1516년 추정)의 그림 ‘광인들의 배’는 시대가 어수선할 때면 더러 이야기 되는 주목받는 그림이다.
지난 15세기 중엽 유럽문화가 새롭게 재편되던 시대에 유럽인들의 상승하는 경제적인 능력과 풍요로워지려던 당시의 시대상에서 그려진 그림이라 더욱 세인들의 관심을 끈다.
근대라는 새로운 세계를 향해 돛을 올렸지만 그 배에 탄 광인들의 표정은 저마다 절규하듯 무척 힘들고 제각각이다. 배에 탄 이들의 행선지를 잃어버린 모습은 앞으로 닥칠 저급한 풍요를 이미 600여년 전에 충분히 예견이나 한 듯 해 더욱 오금을 저리게 한다.
마치 바보들의 합창을 부르는 듯 광인들의 모습들을 실은 거대한 범선은 이런 모습으로 어떻게 새로운 바다를 헤쳐 나가려는 것인지 암담해 보이지만 유럽은 잘도 항해를 해 와 오늘에 이르지 않았는가.
그런 히에로니무스 보쉬가 다시금 세상에 나와 오늘의 우리들을 그린다면 과연 그 그림은 어떤 장면일까. 동양적인 그리고 너무나 한국적인 그림이 나올 수 있을까라는 의문은 차치하고 그리기만 한다면 그 장면들은 지금 루브르에 남아 있는 내용과 전혀 다를 리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그만큼 우리는 지금 행선지를 잃어버린 항해로 무턱대고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광풍이 언제 불어 닥칠지도 모르는 채 바보들의 합창을 부르며 서로를 향해 핏대를 올리며 망망한 바다만을 응시할 뿐이다.
지금 우리들에게 무엇이 중요한 것인지도 종잡을 수 없다. 경제 살리기에 매진하겠다는 정부와 여야는 역사 국정교과서를 두고 날선 대립을 보이고 있고, 정치권의 최대 논란으로 떠오른 ‘안심번호 국민공천제’는 완전 국민경선제 대안으로 적합한가에 대해 팽팽한 접전을 벌이고 있다.
아무리 사람들은 남의 이목에 얽매여 사는 존재라 하지만 지금 저런 정쟁은 도대체 어떤 이목들이 그들의 심중을 얽어매고 있는 것인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그들 역시 떵떵거리며 자기들 뜻대로 사는 것 같지만 따지고 보면 그 또한 남의 뜻에 이끌려 살아가는 한계를 결코 벗어날 수는 없다. 그러면서 어떻게든 상대에게 인정받고자 몸부림치는 것이 너무 빤히 보여 안타깝다.
논어를 곁눈질해 가며 읽었을 정도라면 ‘남들이 알아주지 않을지라도 불만스럽게 여기지 아니하면 군자가 아니겠는가?’하는 의문쯤은 가져야 하는데 그들에게는 숫제 이런 의문은 아랑곳없어 보인다.
양보하는 것은 너무 거추장스럽고 오직 자기 욕심 내키는 대로 행동하고 남들과 끊임없이 부딪치는 게 전부다. 상대가 알아주지 않을 때 초연히 아무렇지 않다는 생각을 할 수 있어야 하지만 그럴 수는 없다. 절대로 없다.
상대가 알아주지 않을 때 초연해 질 수 있는 사람.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이러한 삶의 태도를 가질 수 있는 사람이 바로 군자라 부를 수 있다. 군자라는 말이 별다른 뜻이 달리 있는 게 아니다. 바람직한 사람이면 그 사람이 바로 군자다.
이러한 우리들의 군자들이 비록 ‘광인들의 배’를 탄다고 해도 그 배는 결코 험악한 바다일지언정 잘 헤쳐 나갈 수밖에 없다. 과연 우리시대 ‘광인들의 배’에는 군자라 부를만한 이들이 얼마나 타고 있을까. 그저 야속하고 궁금하기만 하다.



칼럼니스트·달성문화재단 대표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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