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고장 문화유적 탐방] 72. 오지마을 한덤이와 조길방 고택

1) 프롤로그

우리고장 달서구와 달성군을 통틀어 가장 오지마을은 어디일까? 아마도 가창면 정대리의 한덤이[대암마을]가 아닐까싶다. 한덤이는 북쪽과 서쪽으로는 청룡산과 가창댐, 동쪽으로는 최정산, 남쪽으로는 비슬산에 둘러싸여 있다. 실제로 지도를 펼쳐놓고 한덤이를 찾아보면 세상천지 이런 산골에도 마을이 있나싶을 정도다. 이번에는 우리고장 최고의 오지마을인 한덤이에 있는 조길방 고택에 대해 알아보기로 하자.

2) 대암의 순우리말 한덤이

한덤이는 큰 바위, 즉 대암(大巖)의 순우리말이다. 그래서 한덤이를 다른 말로 대암마을이라고도 한다. 정대 1리에는 모두 6개의 자연마을이 있다. 안매남·바깥매남·평지마·배정·윙계·한덤이 등이다. 이중 자타가 공인하는 오지 중의 오지마을은 단연 한덤이다. 한덤이는 해발 약 450m에 자리한 산골마을이다. 마을의 입지는 북쪽의 청룡산과 동쪽의 최정산을 등지고 멀리 남서쪽의 비슬산을 바라보고 있다. 마치 거대한 삼발이 솥 받침 한 가운데에 마을이 들어앉은 형국이다. 그래서일까. 지금은 정대리를 한자로 정대(亭垈)로 표기하지만 예전에는 ‘솥 정’자를 사용해 정대(鼎垈)로 표기했다. 현재 한덤이에는 5-6가구가 살고 있는데 과거 6·25 한국전쟁 직후에는 피란민들로 인해 15가구 이상이 살았던 적도 있었다고 한다. 한덤이라는 마을이름은 동네에 큰 바위가 있어 생겨난 지명이다. 그런데 최근 필자는 이곳 한덤이에서 이 지명유래설을 구체적으로 뒷받침해주는 중요한 유적을 발견했다. 마을의 한 계곡에서 ‘대암동천(大巖洞天)’이라 새겨진 큰 바위를 발견한 것이다. 기존의 지명유래설에서 말하는 그냥 ‘큰 바위’가 아닌 ‘대암동천’이라 새겨진 큰 바위를 말이다. 그런데 이번에 발견한 대암동천 바위의 진정한 가치는 이게 아니라 다른 곳에 있다. 

3) 대암마을 = 한덤이 = 대암동천

옛 사람들이 경치가 좋거나 은거하기 곳의 바위에다 ‘○○동천’이라 새긴 것을 동천바위라 한다. 이러한 동천바위문화를 동천문화라고 하는데 구곡문화, 팔경문화와 더불어 옛 선비들이 즐겼던 대표적인 경승지문화의 하나다. 구곡문화와 팔경문화가 유교적 배경을 지닌 것과는 달리 동천문화는 도교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는 중국 당나라 때 사마승정이라는 인물이 자신의 저술인 「천지궁부도」에서 신선이 사는 곳을 동천이라고 표기한 것에 기원한다. 그래서일까. 동천바위는 경치가 매우 수려하거나 아니면 세상과는 철저하게 격리된 지역에서만 발견된다는 특징이 있다. 그런 만큼 국내에서 동천바위가 발견된 사례는 그리 많지 않다. 한국전통조경학회에서 간행한 『한국전통조경학회지』(36권3호)에 의하면 2018년을 기준으로 경상북도 지역에서 확인된 동천바위는 모두 79개소다. 그런데 대구에서는 아직까지 단 1개소도 확인된 것이 없다. 따라서 이번에 필자가 발견한 대암동천 바위가 대구광역시에서는 최초로 발견된 동천바위인 셈이다.

4) 산골 오지마을 양반초가

조길방 고택을 찾아가다보면 과연 이런 곳에도 집이 있을까싶다. 그런데 놀라지 마시라. 집은 물론이요 5~6가구가 모여 사는 산골마을 한덤이도 만날 수 있다. 한덤이 마을의 집들 중 유독 한 집이 눈에 띈다. 산골마을 중심부에 모두 4동의 건물로 널찍하게 터를 잡고 있는 초가, 국가민속문화재 제200호로 지정된 ‘달성조길방고택’이다. 이 집의 내력은 현 주인의 10대조 조광국(趙光國)이라는 인물로부터 시작된다. 조광국은 함안조씨 동계공파의 후손으로 당시 집안에 큰 화가 닥치자 세거지인 동촌을 떠나 이곳 한덤이로 이거했다고 한다. 현재 한덤이에 남아 있는 여러 채의 건물 중 가장 오래된 건물은 조길방 고택 안채다. 기존의 자료 및 종도리에 남아 있는 상량문 등에는 이 집의 건립 연도를 1784년(정조 8)으로 표기하고 있다.[사랑채·아래채·부속채는 이후에 다시 건립된 것이다] 참으로 대단한 초가다. 첩첩 두메산골에서 그것도 무려 235년이란 세월을 떡하니 버티고 섰으니 말이다. 그런데 이 집은 좀 특이한 점이 있다. 산골 오두막초가임에도 불구하고 건물의 배치가 양반선비가의 모습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고택의 중심건물이라고 할 수 있는 안채를 중심으로 앞쪽 좌우에 각각 사랑채와 아래채를 두고, 사랑채 뒤쪽으로는 별도의 부속채까지 갖췄기 때문이다. 산골마을의 초가가 대부분 ‘ㅡ’자형 혹은 ‘ㄱ’ 자형의 초가삼간 한 채로 구성된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 집은 거의 양반사대부가의 집이라고 해도 지나침이 없을 것 같다. 참고로 안채의 경우 마당 쪽으로 나 있는 안방의 작은 문과 그 위아래에 놓인 굽은 상·하인방 그리고 대청 전면 중앙에 사용된 두리기둥 등이 특별히 눈에 띈다.

5) 에필로그

2주 전, 필자는 ‘70. 흰사슴과 벗하다, 백록당 우성범’이라는 제목의 연재물을 본 지면에 게재한 바가 있다. 그 연재물에서 필자는 ‘이 마을 어딘가에 백록동천이라 새긴 바위가 있을 것인데…’ 라며 글을 마무리를 했다. 그런데 그로부터 정확히 일주일 뒤, 필자는 우록리 백록동의 산 너머 이웃인 정대리에서 ‘대암동천’ 바위를 발견했다. 그것도 너무나 신기하고 우연하게 말이다. 내친김에 다음에는 이 대암동천 바위에 대해 한 번 알아보기로 하자. ‘정말이지. 귀신 없다 소리 못 한다’

송은석 (대구시문화관광해설사) / e-mail: 3169179@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