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고장 문화유적 탐방] 67. 망향문중 문화류씨와 여호재

1) 프롤로그


실향민 혹은 망향민으로 불리는 이들이 있다. 글자 그대로 고향을 잃고 그리워하는 이들을 말한다. 대표적인 예가 고향땅이 북한에 있거나 댐건설로 고향땅이 수몰된 이들을 들 수 있다. 그런데 이들과는 달리 지금이라도 당장 고향땅을 밟을 수 있는 망향민이 있다. 바로 각종 개발 등의 이유로 고향땅이 사라진 이들이다. 이번에는 400년 세거지를 대구위생매립장에 내어주고 고향땅을 떠난 달성군 다사읍 방천리의 망향문중 문화류씨와 그들의 재실인 여호재에 대한 이야기다.    

2) 시조 류차달과 2세 류효금

문화류씨의 시조는 류차달(柳車達)이라는 인물이다. 그는 본래 황해도 유주[나중에 문화로 바뀜] 사람으로 고려개국에 공을 세워 고려 태조로부터 대승의 관직과 삼한공신의 훈호를 받은 인물이다. 문화류씨는 고려, 조선을 거치면서 수많은 인물들을 배출해 명실 공히 명문의 반열에 올랐다. 그런데 이와 관련해 흥미로운 스토리가 하나 있다. 바로 류차달의 외아들인 류효금(柳孝金)과 호랑이에 얽힌 이야기다. 이 이야기는 1530년(중종 25)년에 발간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실려 있는데 그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류효금이 구월산의 한 절에서 재[齋:불교의식]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큰 호랑이를 만났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호랑이는 입을 크게 벌린 채 눈물을 흘리며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그가 조심스레 호랑이의 입안을 들여다보니 목구멍에 은비녀가 걸려 있었다. 그가 호랑이에게 이르기를 “네가 나를 해치지 않겠다고 약속하면 네 목구멍에 걸린 것을 뽑아주겠다”고 말하니 호랑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호랑이의 목구멍에서 은비녀를 뽑아주었다. 그날 저녁 류효금의 꿈에 산신령이 나타나 이르기를 “목에 무엇인가가 걸려 괴롭던 차에 그대가 나를 구해주었다. 그에 대한 보답으로 그대의 자손들이 대대손손 고관대작이 될 수 있도록 해 주겠다”고 했다. 
정말 구월산 산신령의 영험이 있은 것일까. 문화류씨는 이후 수대에 걸쳐 훌륭한 인물들을 배출했다. 문간공 류공권, 한림학사 대제학 류택, 문정공 류경, 정신공 류승 등이 고려조에서 이름이 났다. 이후 조선조에 와서도 대과에 134인, 당상관 90여인, 시호를 받은 이가 22명인데, 이중에서도 특별히 상신이 9인, 호당이 5인, 청백리가 4인, 공신이 11인에 이르렀다. 우리나라 최초의 족보로 알려진 문화류씨 영락보[1423년]는 현재 서문만이 전하는데 그 시작이 이러하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문화류씨가 번창한 것은 류효금이 호랑이를 살려준 것에 대한 음덕 때문이라고 말한다.’

3) 대구 방천리 입향조 류희상
문화류씨 대구 방천리 입향조는 류

희상이라는 인물이다. 그는 문화류씨 19세로 자는 운여이며, 조선 태종 때의 명신 충경공 류양의 5세손이다. 증조부는 금산군수를 지낸 성곡 류약으로 성종 때 음사로 출사했으나, 연산군 때 간신들의 모함을 받고 무주의 금리로 내려와 은거한 인물이다. 조부는 절충장군 행용양위대호군 류영간, 아버지는 현신교위 용양위부사직 류준, 어머니는 밀양박씨로 박일의 딸이다. 그는 1544년(중종 39)에 충북 보은의 구이목에서 3형제 중 셋째로 때어났다. 두 형은 모두 출세 길에 올랐지만 그는 고향에서 처사로서의 삶을 보냈다. 임진왜란 때 가족을 거느리고 피난길에 나섰다가 대구 달성의 와룡산 아래 여호마을[방천리]에 정착을 했으니, 이로써 문화류씨 대구 방천리 입향조가 되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현재 류희상에 대한 자세한 행적은 전하지 않는다.

 

4) 문화류씨 세천지와 여호재

여호재(驪湖齋)는 방천리에 있는 문화류씨의 재실이다. 1838년(헌종 4) 처음 건립될 때는 방천리 윗마을 뒷산에 있었다. 그로부터 155년 뒤인 1993년, 방천리에 위생매립장이 들어서면서 현재의 자리로 옮겨졌고, 2011년에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중창했다. 현재 여호재는 대구환경자원사업소 인근에 조성된 문화류씨 세천지(世阡地) 경내에 세워져 있다. 세천지라는 말은 세장지(世葬地)와 같은 말로 ‘대대로 이어온 선영’이라는 뜻이다.

5) 방천리 망향비와 망향정

방천리(坊川里)는 와룡산과 금호강에 둘러싸인 마을이다. 그런데 이 마을의 형국이 좀 특이하다. 와룡산은 그 모양이 꼭 말발굽을 닮았는데 북쪽이 터져있다. 그리고 그 터진 쪽을 금호강이 동에서 서로 흐르며 가로막고 있다. 즉 방천리는 4면 중 3면이 와룡산에, 1면이 금호강에 막혀있는 셈이다. 그래서일까. 말발굽 안쪽에 자리한 400년 내력의 방천리 마을은 1989년 윗마을을 시작으로 2005년에는 아랫마을에 이르기까지 위생[쓰레기]매립장이 들어선다. 이로써 방천리 주민들은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고향땅을 떠났고, 지도상에서 방천리라는 전통마을은 사라졌다. 방천리는 다른 말로 여호리·방내리·이반마을 등으로도 불렸다. 본래 방천리에는 밀양손씨가 제일 먼저 터를 잡았고 이어 성주이씨, 진주강씨 순으로 터를 잡았는데, 나중에는 문화류씨와 진주강씨가 번성했다. 현재 방천리 대구환경자원사업소와 서재근린공원 사이에 방천리망향비와 망향정이 세워져 망향민들의 애환을 달래고 있다. 

6) 에필로그

10여 년 전, 금호강변을 따라 방천리 앞을 지날 때면 늘 방천리 입구의 문화류씨세천지 표지석이 눈에 띄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이 표지석이 보이지 않았다. 나중에서야 지금의 자리로 옮겨진 것을 확인하고는 안도에 한숨을 쉬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나저나 새롭게 단장된 지금의 방천리 문화류씨 세천지에서 세상을 바라보니 와룡산의 용머리와 금호강 그리고 멀리 가야산까지 한 눈에 들어오는 것이 참으로 절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