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고장 문화유적 탐방] 66. 현풍곽씨 솔례[소례]종택

1) 프롤로그

‘대구24문’, ‘현풍8문’ 하는 말이 있다. 이는 전통시대 대구를 대표했던 24개 문중과 현풍을 대표했던 8개 문중을 뜻하는 말이다. 요즘의 시각으로 보면 시대에 뒤떨어져도 한참 뒤떨어진 개념이다. 하지만 꼭 그렇지도 않다. 21세기 최첨단정보통신사회인 현재도 대구24문과 현풍8문은 엄연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물론 일상적인 맥락이 아닌 문중문화라는 맥락에서 볼 때 그렇다는 것이다. 이번 이야기는 현풍8문 중 하나인 현풍곽씨 청백리공파의 세거지인 솔례마을과 솔례종택 이야기다.

2) 종가와 주손가

요즘 사람들은 자신들의 큰집을 일러 흔히 종가 또는 종택이라 하고, 그 집에 사는 주인을 종손이라고 한다. 비슷한 말로는 주손가라는 말도 있다. 이 둘은 큰집을 일컫는 말이니 현대적인 관점에서 보면 영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이 둘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바로 불천위 선조를 모시는가의 여부다. 불천위 선조를 모시는 맏집을 일러 종가·종택이라 하고 그 집의 주인을 종손이라고 한다. 반면 수대에 걸쳐 맏집으로 내려왔지만 불천위 선조가 없다면 그 집을 주손가라고 하고 그 집의 주인을 주손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불천위라는 것은 4대봉제사의 범위를 넘어섰음에도 불구하고 제사를 폐하지 않고 영원토록 받드는 선조를 말한다. 따라서 종택에는 불천위선조를 받드는 불천위사당이 있지만, 주손댁 이하 일반 큰집에는 4대조까지를 받드는 가묘만이 있을 뿐이다. 

 

3) 현풍곽씨 청백리공파 솔례[소례]곽씨

현풍곽씨 시조는 고려시대 때 중국에서 고려로 들어온 ‘곽경’이라는 인물이다. 그는 본래 송나라 문연각의 한림학사였는데 7명의 학사들과 함께 1133년(인종 11)에 고려로 들어왔다. 이후 그는 고려에서 과거에 급제하고 공을 세움으로써 관직이 지금의 국무총리격인 금자광록대부 문하시중 평장사에 이르고, 고려 조정으로부터 현효[현풍]에 봉군되었다. 이를 연유로 그의 후손들이 현풍을 본관으로 삼았다. 곽경을 시조로 하는 현풍곽씨는 5세 곽기정과 곽한정 대에 와서 각각 기호파와 영남파로 나뉜다. 영남파는 다시 10세 곽윤명·곽윤광·곽윤현에 이르러 3개 파로 나눠진다. 첫째 집이 현풍 원당을 세거지로 하는 ‘목사공파’, 둘째 집이 영천 마단의 ‘경재공파’, 셋째 집이 현풍 솔례의 ‘청백리공파’이다. 이중 이번 이야기와 관련 있는 문중은 셋째 집 청백리공파이다. 청백리공파라는 파명은 청백리공파의 파조이자 현풍곽씨 솔례마을의 입향조인 이양 곽안방(郭安邦) 선생이 세조 조에서 청백리에 오른 것에 연유한 것이다.

4) 솔례마을, 솔례종택

곽안방이 솔례마을에 입향한 것은 1467년(세조 13)이다. 솔례(率禮)라는 마을이름도 그가 명명한 것으로 예를 따른다는 의미다. 이 마을은 대니산(戴尼山) 남쪽에 자리하고 있는데 대니산은 공자를 머리에 이고 있다는 의미다.[공자의 자가 중니(仲尼)] 마을에는 그 유명한 ‘현풍곽씨12정려각’을 비롯한 존재 곽준의 불천위 사당과 재청을 갖춘 성인재, 곽수의 유연재, 연일당 곽지운의 경모당 같은 재실이 있으며, 마을 서쪽 끝자락에는 곽안방, 곽지운, 곽규, 곽황을 제향하는 이양서원이 있다. 또한 마을 남쪽 용두산 정산에는 대양정이 있다. 마을이름은 본래 ‘솔례’라고 불러야 하지만 예로부터 사람들은 발음하기 편하게 그냥 ‘소례’라고 불렀다. 그래서 생겨난 말이 소례곽씨다. 현풍곽씨는 현풍곽씨인데 그 뿌리를 현풍 솔례로 하는 문중을 일러 특별히 ‘소례곽씨’라고 한 것이다.
이처럼 솔례마을의 역사는 550년이 넘지만 하회마을이나 양동마을처럼 그 내력이 400~500년이 넘는 고건축물들은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 이는 6·25한국전쟁의 참화가 솔례마을을 휩쓸고 지나간 탓이다. 솔례곽씨 종택 역시 전쟁의 참화를 입었지만 다행이 많은 부분이 복원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종택은 소례마을 제일 위쪽에 자리하고 있다. 종택 정침에 해당하는 솔례정사를 중심으로 북동쪽에 불천위 선조인 곽안방 이하 현 종손의 4대조를 모신 불천위사당이 있으며, 북서쪽에 근년에 신축한 재청 추보당이 있다. 정침의 서쪽에는 270년 내력의 옛 추보당이 있으며, 정침 남쪽에는 구거당 등이 있다. 
불천위사당 내삼문 아래 좌우에는 수령 400년이 넘는 배롱나무 고목 두 그루가 서 있다. 청백리공 곽안방을 기리며 심은 나무라고 한다. 불천위사당은 정면 3칸 측면 1.5칸 규모의 겹처마 맞배지붕 건물로 전면으로 반 칸 규모의 퇴를 둔 개방형 사당이다. 다포집 양식에 단청을 입혀 불천위사당으로서의 격을 갖췄다. 신주는 사당 북벽 중앙에 불천위신주를 두고, 그 남쪽으로 동쪽, 서쪽 벽을 좌우로 번갈아가면서 고조, 증조, 조, 고위의 신주를 설치했다. 
대구시문화재자료56호로 등재되어 있는 옛 추보당은 정면 5칸, 측면 2칸 규모의 홑처마 맞배지붕의 건물로 가운데 3칸은 대청, 좌우 각 1칸씩은 방이다. 대청 처마아래에는 포산고가 편액이 걸려있고, 대청 안쪽에는 추보당 편액이 있으며, 좌우 방의 앞쪽 방문 위에는 ‘충효세업’, ‘청백가성’ 편액이 걸려 있다.  
  
5) 에필로그

『포산문헌세고』를 참고하면 현풍곽문에서는 충훈공이 68인, 효자가 109인, 효열부가 71인, 유학자가 142인, 소과 급제자가 194인, 대과 급제자가 73인, 무과 급제자가 92인으로 나타난다. 그야말로 명문이라 할 만하다. 참고로 2016년 발표된 통계청 인구조사자료에 의하면 현풍곽씨는 전국적으로 166,608명이며, 대구·달성에 15,025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송은석 (대구시문화관광해설사) / e-mail: 3169179@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