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고장 문화유적 탐방] 64. 일어선 송덕비 누운 문인석, 수백당

1) 프롤로그

2019년 올해는 3·1만세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는 해다. 때마침 지난 4월 11일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일이었다. 35년간의 일제강점기 동안 우리나라에서는 수많은 애국독립지사들이 배출되었다. 그중에는 우리지역 출신 인물들도 많았다. 이번에는 우리지역 출신 인물로서 대한민국 상해임시정부로부터 조문과 편지를 받은 한 인물과 그와 관련된 유적에 대해 알아보기로 하자. 그 인물은 수봉(壽峯) 문영박(文永樸·1880-1930)이요, 유적은 화원읍 인흥마을에 있는 수백당[수봉정사]이다.

2) 82년 동안 수백당 마루 밑에 누워

2018년 수백당(守白堂)에는 큰 변화가 있었다. 수백당 본채와 경내에 대대적인 보수공사가 있었기 때문이다. 기와도 갈고 조경까지 손을 본 탓에 공사 이전과 이후의 모습이 많이 달라졌다. 그런데 이러한 큰 변화들 사이에 눈에 잘 띄지 않는 작은 변화도 있었다. 작은 변화들 중에서 최고의 압권은 아무래도 ‘문수봉선생영박송덕비(文壽峰先生永樸頌德碑)’인 것 같다.
2018년 8월까지만 해도 수백당을 마주 보고 섰을 때, 맨 좌측과 맨 우측 마루 밑에는 정체불명의 석조물이 있었다. 그런데 9월 초 어느 날 좌측 마루 밑의 석조물이 사라졌다. 아니 사라진 것이 아니라 바로 옆 석가산[石假山·정원 등에 돌을 쌓아 만든 작은 산]으로 옮겨졌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은가! 자고로 비석이라는 것은 땅 위에 서 있어야 하거늘 어떤 연유로 누워있었던 것일까. 그것도 햇빛이 잘 들지 않은 어두컴컴한 마루 밑에서 무려 82년간이나 말이다. 여기에는 특별한 사연이 있었다.

3) 행객등(行客等)은 세우고, 수봉은 뽑으라 하고  

지금의 남평문씨 인흥세거지를 있게 한 인물로는 수봉 문영박 선생을 첫 손가락에 꼽을 수 있다. 그는 경술국치해인 1910년부터 책을 수집했다. 국내의 책은 물론 청나라의 책까지 무려 2만권에 가까운 책을 사들여 인흥마을의 광거당과 수백당에 나누어 보관을 했다. 그러자 전국의 수많은 선비들이 이 책을 보기 위해 인흥마을로 모여들었고, 자연스럽게 광거당과 수백당은 선비들의 사랑방이 되었다. 일제에 나라를 빼앗겼던 암울했던 시절, 이 땅의 선비들에게 도서관과 사랑방이라는 은덕을 베풀었던 문영박. 그는 1930년 향년 51세로 졸했다. 그런데 그가 병중에 있을 때 그로부터 도움을 받았던 선비들이 작은 이벤트를 하나 열었다. 선생의 덕을 칭송하는 작은 송덕비 하나를 마을입구에다 세운 것이다. 하지만 이 비는 오래가지 못했다. 며칠 지나지 않아 뽑혀버렸기 때문이다. 그것도 송덕의 대상이었던 문영박에 의해서 말이다. 당시 병석에 있었던 문영박이 자신을 칭송하는 송덕비가 세워졌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당장 그 비를 뽑으라고 명을 했기 때문이다. 이때 철거된 비는 1936년 그를 기리는 수백당이 건립되자, 그 마루 밑으로 옮겨져 82년의 세월동안 누워있었던 것이다. 높이 92cm, 폭 33cm, 두께 12cm의 작은 송덕비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새겨져 있다. 

이의모이자비진의(以義謀利者非眞義) 의로써 이익을 도모하는 것은 참된 의가 아니오이인요예자비진인(以仁要譽者非眞仁) 인으로써 명예를 구하는 것은 참된 인이 아니다.불모불요이위인의(不謀不要而爲仁義) 도모하지도 요구하지도 않으면서 인의를 행하였으니시만권당주인야(是萬卷堂主人耶) 이분이 바로 만권당 주인이 아니겠는가!
경오구월행객등입(庚午九月行客等立) 경오년(1930) 9월 행객들이 세움

4) 누워서도 할 말은 다하는 문인석

현재 수백당 우측 마루 밑에 누워 있는 석조물은 문인석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무덤 앞에 서 있어야 할 문인석이 이처럼 마루 밑에 누워 있는 것일까? 이 문인석은 본래 문영박의 묘 앞에 세우려 했던 한 쌍의 문인석이었다. 하지만 송덕비 스토리에서 살펴본 것처럼 문영박은 생의 마지막 순간에도 선비로서의 처신이 어떠해야하는 지를 몸소 보여준 인물이었다. 사정이 이러하니 그의 후손들은 문인석을 준비해놓고도 차마 세울 수가 없었던 것이다. 문인석이 처사로서의 삶을 살다간 그의 명예에 오히려 누가 될 수 있다고 판단을 한 것이다. 그런데 누워있는 문인석을 보니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산속 묘소에 서 있는 것 보다 재실 마루 밑에 누워있는 것이 오히려 세상을 향해 더 많은 메시지를 던져주는 것 같아서 하는 말이다. ‘거참, 마루 밑에 누워서도 할 말은 다 하는구나’

5) 대한국춘추주옹(大韓國春秋主翁)

1930년 문영박이 졸하자 중국의 상해임시정부에서는 이교재라는 밀사를 통해 조문 1통과 편지 1통을 달성의 인흥마을로 보냈다. 하지만 국내에 잠입한 이교재는 편지를 미처 전달하지 못한 채 왜경에 체포되어 옥사했다. 그로부터 33년의 세월이 흐른 1963년 어느 날, 마치 영화 같은 일이 일어났다. 이교재의 후손이 집수리를 하다가 천정에서 그 편지를 발견해 주인에게 전달한 것이다. 편지가 발송된 지 무려 33년 만의 일이었다. 그리고 이 편지를 통해 문영박의 손자들은 할아버지가 비밀리에 독립군자금을 대며 독립운동을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문영박도 왜경에 체포되어 구금된 적이 있었지만 끝까지 독립운동사실은 발설하지 않았다고 한다.] 조문에는 문영박을 ‘대한국춘추주옹’으로 칭했는데 이는 역사의 주인이 되는 분이란 뜻이다.

6) 에필로그

수백당은 문영박의 다섯 아들이 아버지를 기리며 건립한 재실이다. 인흥마을 입구에 위풍도 당당하게 서 있는 수백당은 정면 6칸·측면 2칸 규모의 겹처마 팔작지붕의 건물로 솟을대문, 석가산, 뜰의 소나무 고목  등 근대기 우리네 한옥건축의 품격을 제대로 보여주는 건축물이다. 수백당이라는 당호는 청렴결백을 지키는 집이라는 의미다.

송은석 (대구시문화관광해설사) / e-mail: 3169179@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