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고장 문화유적 탐방] 62. 노당 추적을 경모하다, 경로재

1) 프롤로그


달성군 화원읍 인흥리에는 인흥서원이 있다. 『명심보감』의 편저자로 잘 알려진 노당 추적 선생을 제향하고 있는 서원이자, 국내 유일의 명심보감 목판을 소장하고 있는 서원이다. 참고로 인흥서원에 대해서는 「인흥서원, 추적 그리고 명심보감」이라는 제목으로 본 지면에서 2회에 걸쳐 이미 연재한 바가 있다. 그런데 달성군 다사읍 이천리에도 추적을 기리는 유적이 한 곳 있다. 바로 ‘경로재(景露齋)’라 불리는 재실이다.

2) 재실의 자기소개서, 재실기문

재실의 기문에 대해서는 이미 여러 번에 걸쳐 언급한 바가 있다. 답사를 다니다보면 재실 의 대청 벽면에 각종 기문이 걸려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건물을 창건할 때의 내력을 기록한 창건기문, 건물을 중수하게 된 경위를 기록한 중수기문, 건물을 옮긴 경위를 기록한 이건기문 등등. 평소 필자가 재실을 가리켜 스토리텔링의 보고라고 주장하는 것도 바로 이 기문 때문이다. 건물의 나이가 아무리 많고, 그 내력이 아무리 복잡다단해도 기문만 남아 있다면 건물의 정체를 파악하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기문에도 결정적인 문제가 하나 있다. 바로 대부분의 기문이 한문으로 되어 있다는 점이다. 슬프게도 우리는 전 세계를 통틀어 불과 100년 전의 선조들이 사용한 문자를 읽지도 쓰지도 못하는 거의 유일한 민족이라고 한다. 매번 답사 때마다 눈앞에 걸려 있는 한문으로 된 기문을 보면서 씁쓸한 느낌이 드는 것은 비단 필자만은 아닐 것이리라. 경로재 대청에도 여러 시판들 사이로 경로재의 내력을 한문으로 기록한 「경로재기」가 걸려 있다. 이번에는 이 「경로재기」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한 번 풀어가 보기로 하자.

3) 노당 추적을 경모하다

경로재는 달성군 다사읍 이천리에 소재한 추계추씨 문중의 재실이다. 고려 말 대학자이자 문신이었던 추적의 후손 중 일부가 우리 고장인 금호강 하류의 다사읍 일원에 세거를 했는데, 이중 하나가 이천리의 추계추씨 문중이다. 「경로재기」에 의하면 이천리의 추계추씨들은 입향 이후 오랜 세월동안 여력이 없어 예와 학을 제대로 갖추기가 어려웠다고 한다.[겸양을 앞세우는 이런 식의 기술은 옛글의 상투적 표현이자 특징이다.] 그러던 1923년 봄, 비로소 문중에서 의논하여 마을 동쪽에다 재실 한 채를 짓고 ‘경로재’라 이름 했다. 여기서 ‘경로’라는 말은 노당 추적 선조를 경모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경로재는 이후 40여 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풍우와 병란(6·25사변)을 거치면서 훼손이 되었다. 이에 옛 건물은 철거하고 1966년에 지금의 자리로 옮겨 경로재를 새롭게 건립했다. 이때 추적의 후손인 추병석이 전병태에게 기문을 청했고, 그때 작성된 기문이 지금 경로재에 걸려 있는 「경로재기」다. 참고로 기문의 서두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추적의 묘와 사당이 이곳에서 멀지 않은 인흥마을에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에다 또 재실을 건립하는 것은 이천에 살고 있는 추계추씨 문중원들의 선조 현창의 뜻을 드러낸 것이다. 동시에 근세의 선조가 아닌 먼 윗대 선조의 재실을 일삼는 것은 그 추숭의 극진함을 보이기 위함이다.’ 「경로재기」 중반 이후의 내용은 마음공부와 『명심보감』에 대한 내용들이다. 기문은 말미에서 추적의 후손들에게 『명심보감』을 열심히 공부하기를 당부하고 있다. 그리하여 그 효험으로 인해 추계추씨 종족이 번성·화목하고, 이 재실의 이름에도 부끄러움이 없도록 하며, 선생의 음덕 또한 크게 발복하기를 기원하고 있다.

4) 이천리의 마을정자

경로재는 전면으로 작은 평대문을 끼고 있는 시멘트블록 담장과 한쪽 측면과 후면을 둘러싼 나지막한 돌담장 안에 세워져 있다. 6·25사변 직후라는 중건 연도가 말해주듯이 건물의 규모나 사용된 부재 그리고 건축양식 등에 있어서는 크게 두드러진 특징은 보이지 않는다. 경로재는 정면 3칸, 측면 1칸 반 규모의 홑처마 팔작지붕 건물로 정면에서 마주보고 섰을 때 좌측에서부터 1칸 대청, 2칸 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면으로는 반 칸 규모의 툇마루가 있고, 측면과 배면으로는 그 보다 폭이 좁은 쪽마루를 외벽에 붙여 달아놓았다. 사방으로 달아 놓은 이 좁고 긴 쪽마루의 용도를 생각해보니, 마치 동네 어귀 정자나무 아래에 놓여 있는 평상이 떠오른다. 지금의 경로재는 앞뒤좌우에 건물들이 있어 조망권은 기대할 수가 없다. 하지만 예전에는 경로재가 이천리의 마을정자, 행정복지센터, 랜드마크쯤은 되지 않았을까?

5) 에필로그

경로재는 이천리 마을입구에서 마을 안쪽으로 조금 더 들어가 본격적으로 동네가 시작되는 지점에 있다. 이천리는 다른 말로 ‘이내[伊川]’라고도 한다. 본래의 자연부락명이 ‘이내’인데, 이내를 한자식으로 표기한 것이 바로 이천이다. 십 수 년 전까지만 해도 이 마을은 마을 이름만큼이나 아름다웠던 마을이었다. 하지만 근년에 들어 마을 여기저기에 난립한 공장들로 인해 전통마을로서의 경관은 사라졌다. 게다가 최근 마을입구를 가로질러 대구 4차 순환선 고가도로가 개설되면서 이내마을의 풍광이 또 다시 파괴되어 안타까울 따름이다. 참고로 이천리에는 경로재 외에도 추계추씨 문중의 ‘고동재’, 달성서씨 문중의 ‘앙모재’, 비각인 ‘영사각’과 인근에 낙재 서사원을 제향한 ‘이강서원’과 고운 최치원의 유적인 ‘선사골’도 있다. 또한 마을 중심부까지 뻗어 내려온 한 산줄기에 달성서씨 선영이 조성되어 있는데, 대구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명당으로 소문이 난 곳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