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고장 문화유적 탐방] 52. 도통바위와 천인득도지지, 도성암

1) 프롤로그


비슬산의 두 성사 도성(道成)과 관기(觀機). 비슬산의 불교문화를 이야기할 때면 약방의 감초처럼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인물이다. 두 인물은 일연스님의 『삼국유사』를 통해 세상에 알려진 스님이다. 대체로 신라후기의 인물로 알려진 도성과 관기는 각각 비슬산의 북쪽과 남쪽에서 수도하고 득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이 두 인물은 『삼국유사』에 그 내용이 기록으로 남아 있고, 이들의 유적지로 알려진 도성암과 관기봉이 현존하고 있는 만큼 불교설화 이상의 가치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이번 이야기는 도성의 발자취가 남아 있는 비슬산 도성암(道成庵)에 대한 이야기다.  

2) 포산이성(包山二聖) 도성과 관기

『삼국유사』 피은편에 「포산이성」이라는 스토리가 있다. 포산[비슬산]의 두 성인이라는 뜻인데 그 내용의 대략은 이렇다.

신라 때 비슬산에 도성과 관기라는 두 성사가 있었다. 도성은 비슬산 북쪽의 굴에, 관기는 남쪽의 암자에 살았는데 서로 떨어진 거리가 십여 리쯤 되었다. 이 둘은 구름을 헤치고 달을 노래하며 서로 가까이 지냈다. 그런데 이 둘 사이에는 이상한 일이 있었다. 도성이 관기를 부르려고 하면 산 속의 나무가 모두 남쪽을 향해 그 가지를 굽히고, 반대로 관기가 도성을 부르려하면 나무가 북쪽을 향해 가지를 굽히는 것이었다. 마치 ‘어서오십시오’ 하고 인사라도 하듯이. 여러 해가 지난 어느 날. 도성이 굴 뒤 큰 바위에서 좌선을 하던 중, 몸이 바위를 뚫고 하늘로 올라갔는데 그 간 곳을 알 수 없었다. 세상 사람들은 그가 지금의 수성구나 가창쯤에서 몸을 버렸다고 이야기를 했다. 얼마 뒤 관기도 도성을 따라 세상을 떠났는데 그 역시 간 곳을 알 수 없었다. 지금 두 성사의 이름으로 그 옛터를 이름 하였는데 비슬산의 도성암과 관기봉이다.  

세상을 피해 비슬산에 은거한 도성과 관기. 둘은 산중의 자연물과도 교감을 나눌 정도로 도통했던 인물들이었다. 하지만 그 끝은 알려진 바가 없다. 바위를 뚫고 하늘로 올라 몸을 버렸다는 도성. 문득 『삼국유사』에 소개된 진표율사의 마지막 행적이 오버랩 된다. 진표율사는 도성과 거의 동시대 인물이다. 도성은 신라 땅 비슬산 도성암에서 몸을 던졌고, 진표율사는 백제 땅 변산의 천 길 낭떠러지 불사의방에서 몸을 던졌다. 다만 도성은 그 간 곳을 알 수 없었고, 진표율사는 미륵불로 화신해 백제유민들의 한을 어루만졌다는데. 도대체 도성과 관기는 어디로 간 것일까?

3) 천인득도지지(千人得道之地)

비슬산 도성암은 선산 도리사, 팔공산 성전암과 더불어 경북 3대 수행도량 중 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이는 그 내력도 내력이지만 영남의 3대 명산인 지리산·가야산·덕유산을 한 눈에 조망할 수 있을 정도로 뛰어난 자연환경 역시 한 몫을 한 탓이다. 예로부터 도성암은 ‘천 명이 도통하는 터’, 즉 천인득도지지로 불렸다. 당연히 이런 말이 허투루 만들어졌을 리 없다. 『삼국유사』 「포산이성」 조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기 때문이다.

비슬산 산신의 이름은 정성천왕인데 일찍이 가섭불 시대에 부처님의 부축을 받고 중생을 구제하려는 염원을 세웠다. 정성천왕의 염원은 산 속에서 1천 명의 출세를 기다린 후에 남은 과보를 받겠다는 것이었다.

지옥으로 떨어지는 중생들을 모두 구제한 후에 부처가 되겠다는 서원을 세운 지장보살처럼, 비슬산신은 산중에서 1천 명의 출세를 기다린 후에 과보를 받겠다고 염원을 세운 것이다. 바로 이 스토리에 근거해 도성과 관기 그리고 성범 등을 배출한 비슬산 최고의 수도처 도성암을 천인득도지지라 칭하는 것이다. 
 
4) 도성이 가고 200년 후 성범이 오다

도성이 바위를 뚫고 사라진 후, 그 바위는 도성암(道成巖) 혹은 도통바위로 불렸고, 그 아래에 도성암이 세워졌다. 그로부터 약 200년 후인 982년, 성범이라는 스님이 도성암의 주지로 있었다. 성범은 도성암에 만일미타도량을 열고 50년 세월동안 신심을 다했다. 그런데 성범의 도력이 있은 것인지 아니면 도성의 영험이 있은 것인지 도성암에서 신비한 일이 일어났다. 당시 현풍 신도 20여 명이 성범과 뜻을 같이 해 결사를 맺고 매년 향나무를 도성암에 바쳤다. 그런데 밤이 되면 이 향나무가 밝은 빛을 내는 이적이 있었던 것이다. 이를 두고 사람들은 도성과 관기 혹은 비슬산신인 정성천왕의 감응이 이적으로 나타난 것이라고 했다. 참고로 『삼국사기』 「포산이성」조에는 포산구성(包山九聖)에 대한 이야기도 있다. 포산구성은 관기·도성·반사·첩사·도의·자양·성범·금물녀·백우인데, 이들에 대한 자세한 내력은 알려져 있지 않다.

5) 에필로그

수도암 뜰에는 도성나무로 명명된 느티나무 보호수가 한 그루 있다. 그리고 그 옆에 다음과 같은 경고팻말이 세워져 있다. ‘이곳은 스님들이 참선하는 곳이오니 일체 말을 하지 마시오.’ 즉 수행에 방해가 될 수 있으니 묵언해달라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우리나라 불교에서는 묵언수행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이는 소리보다는 뜻을 중요시하는 한자문화와 유교문화의 영향을 받은 탓이다. 하지만 인도불교를 계승한 티베트불교는 그렇지 않다고 한다. 스승과 제자가 서로 눈빛으로 도를 주고받는 것이 아니라 말을 통한 치열한 논쟁을 통해 도를 주고받는다는 것이다. 이처럼 문화라는 것은 동일한 종교 안에서도 서로 다른 양상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하지만 로마에서는 로마법을 따라야 하는 법. 도성암에서는 경고팻말처럼 묵언하고 또 차수를 하자. 하긴 법당 뜰에 서서 대웅보전 뒤 도통바위나 산 아래로 펼쳐진 진경을 바라보노라면 더 이상 말이 필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