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묻고 답하다] 불안

우리가 느끼는 불안은 아이러니하게도 엉뚱한 데서 발생하기도 한다. 그리고 불안은 철저히 상대적인 것에서 분출된다. 동창회를 한 번 생각해 보자. 동창회야 말로 불안을 야기하는 진원지이다. 고만고만한 사람들이 서로를 비교하기 때문이다. 학교 다닐 때 나보다 공부를 못했던 동창이 더 많은 보수를 받고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한다는 것 자체가 스스로를 우울하다 못해 불안하게 만든다. 저 친구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못한 현실적 격차가 스스로를 알 수 없는 불안으로 몰고 간다. 결국 상대와의 비교 욕구가 불안의 또 다른 근원이 되는 셈이다. 결국 인간은 절대적인 것에서 불안을 느끼기보다 상대적인 것에서 불안이 증폭된다. 워렌 버핏이나 이 건희 회장에게서는 불안을 느끼지 않지만 갑작스레 출세하고 부자가 된 동창을 만나면 왠지 자신 안에서 불안을 느끼게 되는데 그 이유가 바로 거기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불안을 줄이는 방법은 무엇일까? 루소는 그 방법을 아주 간단하게 ‘벌거벗은 야만인’의 자세로 살아가는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벌거벗은 야만인이라고 불안으로부터 자유로웠을까? 그렇지 않다. 불안은 인류의 가장 오래된 동거인이다. 태고 적에 인간은 큰 동물들의 위해와 천재지변의 위험 때문에 불안했다. 농경 생활을 한 이후로는 먹을거리가 떨어질까봐 불안했다. 산업 사회 이후에는 경쟁에서 뒤쳐질까봐 불안했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는 누리는 것들을 잃을까봐 불안해한다.
‘스트레스 기준표’라는 것이 있다. 이것은 우리가 일상에서 받는 스트레스를 수치로 측정한 것이다. 이에 따르면 배우자의 사망(100), 이혼(73), 결혼(50), 실직(47), 임신(40), 성생활 불만(39), 새로운 가족(39), 이직(36), 가정불화(35), 졸업과 입학(26), 이사(20) 등에서 사람들은 과도한 스트레스를 느낀다. 일반적으로 스트레스 지수가 150~300이면 불안 장애와 더불어 2년 내 심각한 질병에 걸릴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하지만 인간에게서 불안을 완전히 없애겠다는 욕심은 금물이다. 불안은 결코 완전히 사라질 수 없다. 다만 줄이고 관리하며 다스릴 수 있을 뿐이다. 불안을 다스리기 위해 가장 먼저 할 일은 자신이 불안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 다음은 그 불안과 직면하는 것이다. 지금 우리는 불안의 불가피성과 불안의 역설을 이해하면서 불안의 노예가 아니라 불안의 주인이 되기 위한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불안의 노예는 그것에 끌려 다니지만 불안의 주인은 그것을 역이용해 놀라운 추진력을 발휘한다.
“녹은 쇠에서 생긴 것인데 쇠를 갉아 먹는다. 욕심은 마음에서 생긴 것인데 마음을 갉아 먹는다” 법정 스님의 말씀입니다.

구용회 건양사이버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