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고장 문화유적 탐방] 200. 유교문화 성지, 대니산 반경 10리(1)

1) 프롤로그
유교문화하면 으레 안동·영주를 떠올리게 된다. 그도 그럴 것이 안동[한국정신문화의 수도]과 영주[선비의 고장]는 예로부터 자타가 공인하는 유교와 선비의 고장이다. 그런데 이에 못지않은 고장이 또 있다. 바로 우리 고장인 달성군이다. 특히 2019년 7월 ‘한국의 서원’이라는 이름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도동서원을 끼고 있는 대니산 반경 10리 지역은 과히 유교문화 성지라 할 수 있다. 종택·세거지·서원·향교·정려각·누정·재실·선영·불천위사당 등 여러 유·무형 유교문화유산이 차량으로 10-20분 거리 내에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전국적으로도 이처럼 다양한 유교문화 유산이 한 지역에 집중적으로 몰려 있는 예는 많지 않다. 이번에는 2회에 걸쳐 ‘유교문화 성지’라 할 수 있는 대니산 반경 10리 안쪽에 산재한 유교문화유산에 대해 알아보자.

대니산 반경 4km 권역
현풍 읍내 방향에서 바라본 대니산

2) 공자를 머리에 이고 있는 산, 대니산
대니산은 대구시 달성군 현풍읍과 구지면의 주산[408m]으로 동쪽을 제외한 북·서·남쪽은 낙동강이 둘러싸고 있다. 대체로 산 북동쪽은 현풍읍, 남서쪽은 구지면이다. 산 정상에 서면 동쪽으로 비슬산, 서쪽으로 합천 가야산, 남쪽으로 창령 화왕산, 북쪽으로 대구 팔공산 등이 낙동강과 함께 조망된다. 대니산은 예로부터 ‘태리산(台離山)·대니산(代尼山)·제산(悌山·梯山)·금사산(金寺山)·솔례산·구지산·수리산’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리다가 지금은 대니산(戴尼山)으로 정리됐다.
대니산이란 산 이름은 한훤당 김굉필 선생으로부터 유래됐다는 설이 있다. 서울 정릉에서 태어난 선생은 혼인 후 처향인 합천 야로와 처외가인 성주 대가 등을 거쳐 지금의 대니산 자락에 정착했다. 선생은 뒷산의 이름을 ‘머리에 일 대(戴)’, ‘중 니(尼)’, 대니산으로 명명했다. ‘공자를 머리에 이고 있는 산’이란 뜻이다.

사마천의 『사기』 「공자세가」에 따르면 공자는 몰락한 송나라 귀족 가문 출신이다. 공자의 6대조인 ‘공보가’의 후손들은 송나라를 떠나 노나라에 정착했다. 몰락 귀족 가문으로 명맥을 유지하던 공보가의 후손 중에 ‘숙량흘[공흘]’이란 걸출한 인물이 있었다. 바로 공자의 아버지였다. 그는 비록 몰락 가문 출신이었지만 두 번의 전투에서 큰 공을 세워 노나라에서 이름이 났다. 하지만 환갑을 넘긴 나이에도 그는 가문의 명운을 걸만한 변변한 아들이 없었다.[첫 번째 부인에게서 ‘맹피’라는 아들을 얻었으나 절름발이였다] 아들을 얻기 위해서였을까? 늙은 전쟁영웅 숙량흘은 스무 살도 안 된 꽃다운 처녀 ‘안징재’에게 새장가를 들었다. 숙량흘과 안징재는 아들을 얻기 위해 곡부 남쪽 다섯 산봉우리 중 가운데 봉우리인 니구산에서 기도를 했다. 부부의 기도가 통한 것일까? 기다리던 아들이 태어났다. 우리가 아는 공자였다. ‘공자(孔子)’는 이름이 아니다. 공자는 공씨 성을 지닌 큰 선생, ‘공선생’이란 뜻이다. 실제 공자의 성과 이름은 ‘공구(孔丘)’, 별칭인 자(字)는 ‘중니(仲尼)’다. 숙량흘 부부가 니구산(尼丘山)에 기도해 얻은 아들이었기에 이름을 ‘구(丘)’, 자를 ‘중니’로 한 것이었다. 참고로 ‘중’은 ‘맹·중·숙·계’에서 나온 말로 맹은 맏이, 중은 둘째, 숙은 셋째, 계는 막내라는 의미다.

3) 유교문화의 출발, 종택과 세거지
유교는 ‘인(仁)’을 핵심 키워드로 모든 사람이 더불어 잘 살 수 있는 대동사회 구현을 목표로 하는 종교 혹은 학문이다. 유교에서는 ‘충·효·열’ 같은 유교사상을 생활 속에서 실천하는 것을 중요시하는데, ‘나→가정→문중→지역→국가’로 확산되는 방식을 지향한다. 익히 알고 있는 ‘수신제가치국평천하’가 그것이다.
종택과 세거지는 유교문화의 출발이라 할 수 있는 ‘수신’과 ‘제가’ 문화를 잘 보여주는 유교문화유산이다. 대니산 반경 10리[4㎞] 안에는 여러 종택과 세거지가 있다. 이중 특별히 세상에 이름난 종택과 세거지 두 곳이 있다. 한훤당 종택이 자리한 못골[지동] 서흥김씨 세거지와 솔례곽씨 종택이 자리한 솔례[소례] 현풍곽씨 세거지다.
서흥김씨 세거지는 본래 지금의 못골이 아닌 도동서원이 있는 도동리였다. 지금으로부터 약 550년 전, 조선 세종 때 예조참의를 지낸 김중곤[김굉필의 증조부]이라는 인물이 현풍곽씨 문중에 장가들면서 도동리와 처음 인연을 맺은 것. 이후 1779년(정조 3) 김굉필의 11세손 김정제 때 종택과 세거지를 지금의 못골로 옮겨 현재에 이르렀다.
한편 솔례 현풍곽씨 세거지는 현풍지역 성씨 세거지로는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입향조는 세종 때 해남현감을 지낸 청백리공 곽안방 선생이다. 선생이 관직을 내려놓고 솔례마을로 입향한 때가 세조 때라 하니 그 역사가 최소 550년이 넘는다. 마을에는 종택 외에도 곽준 선생 불위천 사당과 문중 재실인 유연재 등이 있다.
이처럼 유서 깊은 못골과 솔례 두 마을은 대니산 남동쪽 산줄기 하나를 사이에 두고 차량으로 불과 1-2분 거리에 인접해 있다. 두 종택에는 각각 격조 높은 불천위 사당과 고풍스런 제청을 갖추고 있으며, 현재 종손내외가 종택을 지키고 있다.
이외에도 대니산 자락에는 골골마다 달성을 대표하는 여러 성씨문중 세거지가 지금도 많이 남아 있다. 현풍읍 쪽에는 오산리 말뫼마을 이천서씨 세거지[추모재]와 홀개 연주현씨 세거지[낙은재], 자모리 연안차씨 세거지[모원재], 지리 원당 현풍곽씨 세거지[암곡서원·추원당·월계정], 대리 범안골 경주최씨 세거지[추모재·모죽정] 등이 있으며, 구지면 쪽에는 창리 김해김씨 세거지[영모재]와 밀양박씨 세거지[박성 불천위 사당], 응암리 덕곡 남양제갈씨 세거지[제갈남학 효자비각], 화산리 현풍곽씨 세거지[화산서원], 징리 경주이씨 세거지[첨가재]와 현풍곽씨 세거지[영사재], 오설리 군위방씨 세거지[영모재]와 현풍곽씨 세거지[오산재], 도동리 서흥김씨 세거지[도동서원·정수암·관수정·낙고재]와 송림 밀양박씨 세거지[송담서원] 등이 있다.
<다음에 계속>

송은석 (대구시문화관광해설사) / e-mail: 3169179@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