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고장 문화유적 탐방] 185. 하빈면 순천박씨 의관장묘와 전의이씨 의관지장비

1) 프롤로그
얼마 전 한 지인으로부터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최근 본 지면을 통해 나간 필자의 글 ‘효열부 전의이씨 이신옥, 절명사비 (1), (2)’를 잘 읽었다는 인사와 함께 질문을 하나 해왔다. 질문의 요지는 이렇다.

자신이 살고 있는 동네 인근 마을인 하빈면 기곡리 터실에 ‘하마비’라 불리는 비석이 하나 있다. 비석에는 하마비라 쓰여 있지 않고 ‘전의이씨의관지장(全義李氏衣冠之藏)’이라 쓰여 있다. 도대체 이 비석의 정체가 무엇이냐?
필자는 터실 ‘전의이씨의관지장비’에 대해서는 익히 잘 알고 있었지만 이 비가 하마비로도 불린다는 이야기는 처음 듣는 내용이었다. 이번에는 우리 고장에 있는 ‘의관장묘’와 ‘의관지장비’에 대한 이야기다.

2) 장구지소와 의관지장
자주 만나는 상황은 아니지만 답사 때나 아니면 서원·재실 등의 기문 등을 읽다보면 가끔 ‘○○선생장구지소(杖屨之所)’라는 표현을 만날 때가 있다. 장구(杖屨)는 지팡이[杖]와 짚신[屨]을 말한다. 따라서 ‘○○선생장구지소’는 ‘○○선생께서 짚신을 신고 지팡이를 짚으며 거닐던 장소’라는 뜻이다. 다른 말로는 ‘신 구(屨)’ 대신 ‘신 리(履)’ 자를 써서 ‘장리지소(杖履之所)’라고도 한다. 예천 수락대 ‘서애선생장구지소’, 지리산 백운동 ‘남명선생장구지소’, 경기도 노고산 ‘미수선생장구지소’ 등이 대표적이다.
‘의관지장(衣冠之藏)’은 장구지소와는 완전히 상반된 표현이다. 의복[의]과 갓[관]을 묻었다[장]는 뜻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지팡이를 짚고 짚신을 끌며 소요한 곳이 아니라 의관을 묻은 곳, 즉 묘소를 뜻한다. 그런데 이 말은 상황에 따라 이해를 잘 해야 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서로 다른 두 가지 의미로도 사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어떤 때는 시신 대신 ‘의관’을 묻은 묘소를 뜻하기도 하기만, 또 어떤 때는 의관이 아닌 ‘시신’을 묻은 묘소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 두 가지 사례가 모두 우리 고장인 달성군 하빈면에 있다. 하나는 묘골 순천박씨 ‘의관장묘’요, 다른 하나는 터실 ‘전의이씨의관지장’이다.

의관장묘(상), 박일산 부부묘(하)


3) 묘골 순천박씨 ‘의관장묘’
하빈면 묘골과 파회마을은 사육신 취금헌 박팽년 선생 직계 후손들이 560년 세월 세거해온 유서 깊은 마을이다. 이 두 마을은 낮은 언덕에 의해 나눠져 있는데 그 사이로 작은 고갯길이 있다. 이 고갯길 고갯마루 한 쪽에 ‘의관장묘(衣冠葬墓)’라 불리는 묘가 있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옷이나 머리에 쓰는 갓 등으로 장사 지낸[葬] 묘소다.
이 의관장묘는 박팽년 선생의 둘째 아들 박순과 그의 부인인 성주이씨의 합폄묘(合窆墓)다. 지금으로부터 565년 전인 1456년(세조 2) 6월. 사육신 사건으로 박팽년 선생 집안은 부·자·손 3대에 걸쳐 9명의 남자가 죽임을 당함으로써 대가 끊어졌고, 집안 여인들은 공신이나 관청의 노비가 됐다. 하지만 충신의 가문을 불쌍히 여긴 신의 보살핌이 있었던 것일까. 당시 임신 중이던 선생의 둘째 며느리 성주이씨가 아들을 낳았다. 이 아들은 같은 시기에 태어난 성주이씨 친정집 여종의 딸과 바꿔져 비밀리에 키워졌다. 이렇게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박팽년 선생의 손자[처음 이름 박비, 후에 성종으로부터 받은 이름 박일산]로 인해 560년 내력의 묘골 순천박씨 가문이 이어질 수 있었던 것.
끊어질 뻔했던 가문의 대가 다시 이어질 수 있었던 것은 선생의 둘째 며느리 성주이씨의 공덕이 컸다. 물론 성주이씨 부인의 아들과 자신의 딸을 맞바꿔 남몰래 길러준 이름 모를 여종의 공덕 또한 무시할 수 없다. 어쨌든 대구 관아 노비가 된 성주이씨는 사후 자신의 친정곳이자 아들의 태생지인 묘골에 묻히게 된다. 이때 성주이씨는 또 한 번 부덕(婦德)을 발휘했다. 자신의 육신과 남편의 의관이 함께 묻힌 것이다. 이는 사육신 사건 당시 남편의 시신을 수습하지 못한 성주이씨가 대구 관아 노비로 내려올 때 남편의 의관을 대신 챙겨왔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전의이씨 의관지장비

4) 기곡리 터실 ‘전의이씨의관지장비’
묘골[묘리]에서 차로 10여 분 거리에 기곡리가 있다. 기곡리에는 장승리·터실·터개울·못안·모개울·상당[성당]·연지골 등 여러 자연마을이 있다. 이중 터실은 ‘터가 좋다’, 혹은 ‘예전부터 있어온 터’라는 지명유래를 지닌 마을이다. 터실에는 달성군 하빈면·다사읍과 고령군 다산면을 연고로 하는 전의이씨 예산공파 선영이 있다. 이곳 선영은 본래 전의이씨 예산공파 대구 입향조 이필, 그의 아들 이경두, 손자 이종문·이종택, 증손자 이지영, 현손자[4세손] 이전·이유·이구까지 5대에 걸친 선대 묘소와 함께 이 묘소를 수호하는 재실 이유재가 있었다. 그런데 2005년 서울 구로구 궁동 선영이 택지개발이 되자 이필의 조부 이세분과 부 이광원의 묘도 이곳 옆 능선으로 옮겨왔다. 이런 까닭에 터실은 대구 달성과 고령을 연고로 하는 모든 전의이씨의 혈연적 뿌리이자 정신적 고향이라 할 수 있다.
이곳 기곡리 터실 가는 길 오른쪽 길가에 ‘전의이씨의관지장(全義李氏衣冠之藏)’이라 새긴 오래된 표지석이 하나 서 있다. 높이 160㎝, 너비 67㎝, 두께 12㎝인 이 비석은 이 지역이 전의이씨 선대 선영이 있는 곳임을 알리는 표지석이다. 표지석에는 전면 중앙에 세로로 ‘전의이씨의관지장’, 그 좌우에 ‘숭정기원후삼갑오이월일입(崇禎紀元後三甲午二月日立)’이라 새겨져 있다. 이는 숭정 기원[1628년] 후 세 번째 돌아오는 갑오년 2월에 표지석을 세웠다는 뜻이다. 서기로 환산하면 지금으로부터 247년 전인 1774년(영조 50)이 된다.
그런데 ‘전의이씨의관지장’은 앞서 살펴본 묘골 순천박씨 ‘의관장묘’와는 구분할 필요가 있다. 묘골 의관장묘는 시신 없이 의관만 묻혀 있는 묘소인 반면, 전의이씨의관지장은 의관이 아닌 시신이 묻힌 묘소라는 점이다. 이처럼 시신이 묻혔음에도 ‘의관지장’이란 표현을 사용한 것은 선조의 묘소를 높여 부른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葬’이 아닌 ‘藏’이라 쓴 것 역시 같은 맥락이다. 또 하나 흥미로운 것은 전의이씨의관지장비를 ‘하마비’라 칭하기도 한다는 점이다. 이 역시 한 가문의 입향조를 비롯한 선대 묘소가 있는 곳이니 이 비가 있는 곳에서부터는 누구든 말에서 내려 의관을 정제하고 공손히 걸어 들어오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5) 에필로그
한 집안이 역모죄로 풍비박산이 나는 급박한 상황에서도, 조선 최고 사대부가 며느리에서 하루아침에 관청 노비가 되는 상황에서도, 죽은 남편의 의관을 챙겼던 성주이씨. 그 끔찍했던 상황에서도 남편의 의관을 챙겨 후일을 도모했던 그녀의 부덕이 참으로 놀라울 따름이다. 참고로 묘골 의관장묘 바로 아래에 있는 묘가 그녀가 낳은 그 귀한 박팽년 선생의 손자 박일산과 그의 부인 고령김씨의 묘다. 참고로 장구지소를 장리지소라고도 하듯, 의관지장을 의리지장(衣履之藏)이라고도 한다.

송은석 (대구시문화관광해설사) / e-mail: 3169179@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