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고장 문화유적 탐방] 176. 마천고개 열부 창녕성씨 정려각

1) 프롤로그
이번에도 우리 고장에 있는 한 정려각에 대해 알아보기로 하자. 다사읍 이천리와 하빈면 현내리를 잇는 마천고개[마천령]. 이천삼거리에서 현내리 방향으로 마천고개를 550m쯤 가다보면 우측에 정려각 한 동이 있다. 이 길을 자주 다니는 사람들도 이곳에 정려각이 있는지 잘 모른다. 주변이 대나무 숲으로 우거져 있고 정려각 담장이 콘크리트로 되어 있어 그렇다. 게다가 왕복 2차선의 좁은 고갯길이기 때문에 운전자의 눈에 띄기도 힘들고, 설령 눈에 띄었다 해도 차를 세우고 살펴보기도 쉽지 않다. 도보로 이 고개를 넘는 사람도 거의 없다. 이번 이야기는 마천고개에 있는 열부 창녕성씨 정려각에 대한 이야기다.

2) 기막힌 열부 스토리들
열부·열녀 이야기를 할 때마다 드는 생각이 있다. 특히 현장에서 답사객을 대상으로 해설을 할 때 더욱 고민스럽다. ‘과연 이 이야기를 해도 괜찮을까?’ 열부·열녀란 절개가 곧은 여인을 말하며, 절개란 신념·신의 따위를 굽히지 않고 지키는 굳건한 마음이나 태도를 말한다. 그런데 전통사회에서 여인들에 적용되는 절개의 의미는 좀 달랐다. 한마디로 표현하면 ‘일부종사(一夫從事)’였다. 평생 한 남자만을 섬기는 것이 전통시대 여인들에게 적용되는 절개의 시작이자 끝이었던 것이다. 남편이 일찍 죽어도 개가하지 않고 평생 수절하며 청상과부로 사는 것을 미덕이라 여겼으며, 심지어 남편이 죽으면 따라서 같이 죽는 것을 최고의 절개라 권장하기까지 했다. 그래서 생겨난 것이 열부·열녀이며, 열부·열녀를 권장하기 위해 탄생한 것이 열부·열녀비와 정려각이다.
열부·열녀 스토리는 효자 스토리처럼 정형화된 몇 가지 텍스트가 있다. 모든 텍스트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주요내용은 ‘먼저 죽은 남편을 따라 자진한다’는 것이다. 몇 가지 대표 텍스트를 살펴보면 이렇다.

○ 남편이 죽자 남편의 장사를 지낸 후, 혹은 남편의 3년 상을 지낸 후, 스스로 자진했다.
○ 자식 없이 남편이 일찍 죽자 남편의 상례를 다 치루고 양자를 들여 대를 이은 뒤, 남편을 따라 자진했다.
○ 임신 중에 남편이 죽자 뱃속에 있는 아이를 출산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출산 후 남편을 따라 죽었다.

이외에도 현대인의 시각으로는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열부·열녀 사례가 많이 있다. 한 예를 들면 우리 고장에는 집에 강도가 들었는데 남편을 지키기 위해 대신 칼에 맞아 죽은 열부를 기리는 정려각도 있다. 그런데 역사적 사실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지금의 시각이 아닌 당시의 시각에서 바라보고 이해하는 안목도 필요하다. 지금도 종종 연로하신 할머니들을 만나 대화를 해보면, 일부이긴 하나 일부종사·열부·열녀를 미덕으로 여기는 분들이 있다. 지금도 이러한데 200~300년 전 조선시대에는 더 심하면 심했지 덜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대나무 숲 사이 콘크리트 담을 두르고 있는 정려각
홍살 너머로 열부창녕성씨정려비가 보인다

3) 18세 꽃다운 나이로
열부창녕성씨정려각의 주인공은 박지운의 처 창녕성씨 부인이다. 대부분 조선시대 여인들이 그러했듯 그녀 역시 자신의 이름이 아닌 ‘박지운의 처’, 또는 성씨 본관을 따라 ‘창녕성씨부인’으로 불린다. 그녀는 어떤 열부행을 보여 이렇듯 열부 정려각이 세워진 것일까? 1936년 옥산인 장상학이 쓴 ‘열부하산성씨정려기’에 나오는 내용을 요약해보면 이렇다.[하산은 창녕의 별칭이다]

창녕성씨 부인은 고려 충신인 정절공 성사제의 후손인 성구홍의 딸이다. 1791년(정조 15) 12월 20일 18세의 나이로 밀양박씨 매헌 박번의 사손(祀孫) 박지운과 혼례를 올렸다. 하지만 이듬해 1792년(정조 16) 4월 16일 우귀(于歸)도 하기 전에 불행히도 남편 박지운이 죽었다. 그녀는 달려가 분상한 후 눈을 감고 입을 다문 채 일체 음식을 입에 대지 않았다. 시아버지가 눈을 뜨고 음식 먹기를 청하니 “남편이 죽었으니 누구를 위해 입을 열고 눈을 뜨겠습니까”라며 한 번 입과 눈을 열고는 11일 만에 죽고 말았다. 2년 후인 1794년(정조 18) 안찰사가 이 사실을 듣고 조정에 알려 조정으로부터 열부 정려가 내렸다.

지금의 정려각은 1794년 정려가 내려지고 141년 후인 1935년에 건립된 것이다. 콘크리트 담장에 둘러싸인 정려각은 정면·측면 각 1칸 규모로 홑처마 맞배지붕 양식이다. 건물 전체에 단청이 칠해져 있고 정면은 홍살벽, 나머지 3면은 흙벽이다. 정려각 내부에는 정조 갑인년(1794년) 특명으로 정려를 내렸다는 사실이 기록된 정려편액[열부학생박지운처창녕성씨지려], 장상학이 지은 정려기문, 최근에 세운 정려비[열부창녕성씨정려비] 등이 있다. (위치 : 달성군 다사면 이천리 619-1)

4) 성종 때가 아니고 정조 때 내려진 정려
열부창녕성씨정려각 앞에 세워진 안내판 내용 중에 오류 하나가 눈에 띈다. “성종 25년(1494)에 명하여 정려를 내렸다”는 표현이다. 내용대로라면 이 정려는 지금으로부터 무려 527년 전 성종 임금으로부터 받은 정려가 된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이 정려는 시기적으로 볼 때 대구에 산재한 정려 중 오래되기로는 거의 세 손가락 안에 드는 정려가 된다. 그런데 사실은 그렇지가 않다. 정려편액을 보면 ‘정종 갑인 건륭 특명정려, 을해 3월28일 건각’이라 되어 있다. ‘정종 갑인’은 ‘정조 갑인년’으로 서기로 1794년이다. 또 장상학이 찬한 정려기문에도 갑인년(1794)에 정려를 받고 141년[기록에는 142년으로 되어 있다] 후 을해년(1935)에 정려각을 세웠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기문에 나타나는 갑인년과 을해년이 어느 때 갑인년과 을해년인지는 기문에 나타나는 박지운과 창녕성씨 결혼일인 ‘정묘(正廟·정조임금) 신해 12월 20일[1791년 12월 20일]’로 확인이 가능하다.

5) 에필로그
열부창녕성씨정려각 안내판에 이런 내용이 있다. “…성씨가 나이 18세에 폐백을 받고 시집오기 전에 남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곧 와서 슬피 울고는…” 정려기문에는 이 부분을 “박지운과 초례를 올리고 남편이 처가에 두 번째 방문하는 재행(再行)을 한 뒤, 신부가 우귀(于歸)를 하기 전에 불행히도 남편이 죽었다”고 되어 있다. 이 부분은 이해를 잘 해야 한다. 과거 우리나라 혼례문화는 지금과는 많이 달랐다. 조선전기에는 주로 ‘장가를 갔다’. 남성이 처가살이를 한 것이다. 후기로 오면서는 ‘시집을 갔다’. 여성이 시댁으로 들어간 것이다. 하지만 혼례를 올리고 곧장 시댁으로 들어 간 것은 아니었다. 한 동안 시댁이 아닌 친정에 머물다가 시댁으로 들어갔다. 이를 신행·우귀·우례라고 하는데 달을 넘기는 수도 있고, 해를 넘기는 수도 있었다. 바로 이 시기에 남편이 죽으면 참 난감한데, 이런 처지에 놓인 여인을 미성부(未成婦)라 한다. 다음에는 우리 고장에 남아 있는 한 미성부 묘소에 대해 알아보기로 하자.

송은석 (대구시문화관광해설사) / e-mail: 3169179@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