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고장 문화유적 탐방] 169.연안차씨 집성촌 현풍읍 자모리

1) 프롤로그
현풍읍내 방향에서 도동서원으로 가는 길은 줄곧 왼쪽은 대니산, 오른쪽은 낙동강이다. 왼쪽 대니산 쪽으로 몇 개 마을이 있는데 그 중 자모리라는 마을이 있다. 마을입구에는 ‘延安車氏(연안차씨) 世居地(세거지) 자모리’라 새긴 큰 마을 표지석이 서 있다. 표지석 뒤편으로 제법 너른 들판이 펼쳐지고 그 너머 대니산 골짜기에 집들이 옹기종기 지붕머리를 맞대고 있는 마을이 보인다. 이곳이 400년 내력 연안차씨 집성촌 자모리다. 이번에는 자모리와 자모리 터줏대감 연안차씨에 대한 이야기다.

마을 표지석과 멀리 자모리가 보인다
자모리 연안차씨 재실 모원재


2) 모로촌·자무리·자모리
대구광역시 달성군 현풍읍 자모리(自慕里). 예전에는 모로촌 또는 자무리로 불렸다. 본래는 현풍군 모로면이었는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모로면의 자모동과 여기동을 합쳐 자모동으로 했다가 이후 자모리가 됐다. 모로촌이란 지명은 이 마을을 처음 개척할 당시 마을 주변에 마치 노인의 허연 수염 같은 흰 갈대숲이 우거져 있어 모로촌(毛老村)이라 했다 한다. 자모리란 지명은 해가 지는 서쪽에 위치한 마을이란 뜻에서 자줏빛 자, 저물 모, 자모(紫暮)라고 했다가 뒤에 자모(自慕)로 바뀌었다고 한다. 실제로 자모리는 현풍읍내에서 가장 서쪽에 위치한 마을이다. 자무리는 자모리의 음이 바뀐 것으로 보고 있다.
남쪽을 등지고 북향하고 있는 자모리는 마을 뒷산인 대니산이 들판과 만나는 경계지점에 있다. 마을 북쪽에는 낙동강 범람으로 형성된 비옥한 들판이 있고, 들판 너머로 낙동강이 동에서 서로 흐르는 전형적인 배산임수 지형이다.
자모리는 지금으로부터 약 400년 전 임진왜란 때 형성된 마을로 알려져 있다. 지금의 논공읍 하리[약산마을]에 살던 연안차씨 차순라(車順羅)라는 인물이, 난을 피해 차명상·차명용·차극생·차극상 네 명의 아들을 데리고 피난처로 자리 잡은 곳이 자모리였다. 이후 자모리에 연안차씨가 번성하면서 자모리는 자연스럽게 연안차씨 세거지가 됐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마을주민 대부분이 연안차씨였으나 지금은 그 수가 많이 줄었다. 현재 마을 안쪽에는 자모리 차씨문중 입향조인 차순라를 추모하고 기리기 위해 세워진 재실 모원재(慕遠齋)가 있다. 모원재는 1924년 건립, 1985년 중수한 건물이다.[대청 종도리에 기록된 상량문에는 1984년 9월 상량한 것으로 되어 있다] 정면 4칸, 측면 1.5칸, 홑처마 팔작지붕 건물로 가운데 두 칸은 대청, 좌우 각 한 칸은 온돌방이다.

3) 차류동원설·차류동조이성설
얼마 전까지 ‘차류동원설(柳車同原說)’·‘차류동조이성설(車柳同祖異姓說)’ 같은 말이 있었다. ‘차씨와 류씨는 뿌리가 같다’, ‘차씨와 류씨는 성씨는 다르나 조상은 같다’는 말이다. 그래서 차류대종회는 물론 지역별로 차류종친회가 있었고, 오랜 세월 동안 류씨와 차씨는 서로 간에 혼례도 치루지 않았다. 그런데 지난 2008년을 전후해 차씨와 류씨는 오랜 인연을 뒤로 하고 서로 결별했다.[조선시대에도 이 문제를 두고 약간의 논란이 있었다] 이해를 돕기 위해 차·류 두 성씨가 결별하기 전, 오랜 세월 동안 전해져 내려온 차류동원설에 대해 한 번 알아보기로 하자. 참고로 필자는 두 문중의 주장을 모두 존중하는 입장이니 오해 없기 바란다.

황제(黃帝)의 후손인 사신갑(似辛甲)이 고조선에서 성명을 왕조명(王祖明)으로 고쳤다. 그의 후손 중 왕몽(王蒙)이 다시 자손 번창을 기원하며 성을 세 번 바꾸어 성명을 차무일(車無一)이라 했다. 그는 신라를 세울 때 시중이 되어, 차씨 득성시조(得姓始祖)가 되었다. 신라 애장왕 때 차무일의 후손으로 승상 벼슬에 오른 차승색(車乘穡)이란 인물이 있었다. 그는 애장왕의 왕위를 찬탈한 헌덕왕을 살해하려다 실패해 황해도 구월산(九月山)으로 피신, 자신은 류색(柳穡), 아들은 류숙(柳淑)으로 성명을 바꾸고 살았다. 고려 태조가 삼국통일을 도모할 때 류해(柳海)가 수레를 많이 내어 공을 세우니 태조로부터 차달(車達)이란 이름을 받고, 익찬벽상2등 공신에 올랐다. 이때 태조는 류차달의 장남 류효전(柳孝全)에게 본래 선조의 성씨인 차씨(車氏) 성(姓)을 내려 다시 차문(車門)을 잇게 했고, 차남 류효금(柳孝金)은 류문(柳門)을 계속 잇게 했다. 이리하여 류효전·류효금 형제로부터 차류양성(車柳兩姓)으로 분성(分姓)하게 되었다.

4) 자모리 새끼마을 느티골
자모리에서 도동서원 방향으로 500m쯤 가면 좌측으로 자모리보다 더 큰 골짜기가 하나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골짜기에는 마을이 없다. 현재 이 골짜기 안에는 논, 밭 외에는 1987년 완공된 환경시설공단 달성위생관리소와 몇 몇 공장과 민가만 남아있다. 이곳을 지나 다시 도동서원 쪽으로 500m쯤 가면 근래 개통된 도동터널과 옛 다람재길이 나눠지는 갈림길이 나온다. 이곳에서 좌측 다람재길로 300m쯤 가면 좌측으로 작은 골짜기가 있다. 이곳이 자모리 새끼마을인 느티골, 일명 여기동이다.
400년 전 연안차씨 자모리 입향조 차순라 부자가 마을을 개척할 때, 여유 있게 남아도는 땅이라고 해 여기동(餘基洞)으로 불렀다가 후에 느티골이 됐다고 한다. 느티골로 불린 것은 이 골짜기에 느티나무가 많아서였다. 지금도 느티골에는 보호수로 지정된 느티나무 몇 그루 남아 느티골 지명유래설을 뒷받침해주는 듯하다. 『달구벌 문화 그 원류를 찾아서』(차성호)에 의하면 한때 느티골은 옹기생산지로 유명했다고 한다. 1945년 전후만 해도 느티골에 약 80여 가구가 살았고, 술집만 해도 9곳이나 있었을 정도로 번성한 마을이었다고 한다. 또 마을 앞 낙동강변에는 잠미나루가 있었는데, 강 건너 고령군 개진면 옥산리 잠미마을을 오가는 뱃길이었다. 현재 느티골에는 중소공장 몇 개와 우함복지 한사랑마을이 자리하고 있다.

5) 에필로그
작년 일이다. 태풍 장미가 한반도를 덮친 다음 날인 2020년 8월 9일. 필자는 해설사 근무를 위해 도동서원으로 출근했다. 출근길에 보니 현풍읍내에서 도동서원 가는 길에 있는 달성파크골프장이 화장실 지붕과 나뭇가지만 물위로 드러난 체 범람한 낙동강물에 완전히 잠겨있었다. 다람재 삼거리도 물에 잠겨 통과하는데 애를 먹었고, 도동서원 해설사 부스도 물에 잠겨 있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자모리 들녘은 큰 수해를 입지 않았다. 낙동강 제방과 수리시설이 잘 된 까닭이다. 옛날 낙동강 제방이 없던 시절 자모리 들녘은 비가 좀 온다싶으면 물에 잠기는 상습수해지역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양파와 마늘농사를 주로 하는 옥토로 바뀌었다. 대니산을 등지고, 낙동강과 황금들녘을 앞에 둔 전형적인 배산임수형 명당 자모리.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자모리는 자식[子]과 어미[母]가 다 잘 되는 땅.

송은석 (대구시문화관광해설사) / e-mail: 3169179@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