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우리 고장 구곡(九曲) 문화(1) ‘수남구곡’

1) 프롤로그
몇 년 전이다. 고속도로 휴게소 관광정보센터에서 반가운 홍보물을 접한 적이 있다. 『경북의 구곡문화』라는 작은 소책자였다. 이후 단행본 『대구의 구곡문화』(김문기·2014), 『달성의 구곡과 선유문화』(2018·김문기)를 만났다. ‘구곡문화’는 일반인에게는 낯설다. 하지만 전통문화 특히 유가문화에 관심 있는 사람에게는 매우 익숙한 개념이다. 이번에는 우리나라 구곡문화 중 우리 고장과 관련 있는 구곡문화 몇 개를 3회에 걸쳐 알아보기로 하자. 이번 연재는 위에서 소개한 『대구의 구곡문화』·『달성의 구곡과 선유문화』를 참고했다.

2) 구곡문화 원조, 주자 무이구곡
구곡문화(九曲文化)는 글자 그대로 아홉 굽이 경승지를 즐기고 경영하는 유가문화다. 여기서 ‘아홉 굽이’라 함은 경치가 뛰어난 아홉 장소를 말한다. 하지만 경치가 좋다고 무조건 구곡에 선정되는 것은 아니다. 구곡에 선정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갖춰야 할 몇 가지 조건이 있다. ‘산수·사람·구곡시’가 그것이다. 구곡은 산과 물을 동시에 갖춰야 한다. 구곡으로 선정된 곳이 하나 같이 물을 끼고 있는 것도 다 이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리 뛰어난 산수를 갖췄다 해도 구곡이라 이름 붙이고, ‘구곡시’를 읊어주는 ‘사람’을 만나지 못하면 말짱 도루묵이다.
구곡문화 원조는 주자의 무이구곡(武夷九曲)이다. 주자는 성리학[주자학] 창시자로 조선 선비사회에서 공자만큼이나 추앙받은 인물이다. 무이구곡은 주자가 은거했던 무이산 아홉 절경이다. 주자는 무이 계곡을 끼고 있는 무이산 아홉 굽이에 이름을 붙이고 시를 지었다. 이 시가 바로 ‘무이도가(武夷櫂歌)’다. 이를 모델로 조선 선비들은 연고지에 구곡을 설정하고 경영하면서 구곡문화를 향유했다.
구곡문화를 이해하는 데는 크게 두 가지 접근법이 있다. 구곡시를 예로 들면 순수하게 경치를 노래한 ‘서정시’로 봐야한다는 접근법과 도에 이르는 학문적 단계를 은유적으로 표현한 ‘철학시’로 봐야한다는 접근법이다.

3) 우리 고장 구곡문화
현재까지 알려진 바에 의하면 우리 고장에는 모두 5개의 구곡이 있었다. ‘수남구곡·운림구곡·와룡산구곡·최정구곡·낙강구곡’이 그것이다. 수남구곡은 가창면 최정산과 신천 상류 일대, 운림구곡과 와룡산구곡은 와룡산·금호강·낙동강 일대다. 최정구곡은 최정산 일대의 구곡으로 알려져 있으나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다. 낙강구곡은 현풍·구지 낙동강 일대에 설정된 구곡으로 대구 쪽이 아닌 강 건너 고령 쪽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4) 가창면 수남구곡(守南九曲)
수남은 가창의 옛 지명인 상수서면·상수남면·하수남면에서 ‘수남’을 취한 것으로 지금의 가창면이다. 수남구곡은 현재까지 알려진 대구의 여타 구곡과는 달리 약점이 하나 있다. 구곡문화의 전제 조건인 ‘산수·사람·구곡시’ 중에 사람과 구곡시가 확인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수남구곡을 누가 처음 설정했는지 알 수 없고, 수남구곡시가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은 것. 하지만 다행인 것은 일부 자료를 통해 과거 이 지역에 수남구곡이 존재했다는 사실과 구곡 이름정도는 확인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냉천리 한천에서 시작해 우록리 백록에서 끝이 나는 수남구곡은 신천을 따라 상류로 거슬러 올라가면서 구곡이 설정되어 있다.

제1곡_한천_한천바위

○ 제1곡 한천(寒泉)
냉천리 스파벨리 일원이다. 한천은 찬물이 나는 샘이란 뜻이다. 약 600년 전 김해김씨가 처음 이 마을에 정착할 때, 마을 뒷산에 찬물이 나는 샘이 많아 찬샘·한정·냉천·한천 등으로 불렸다고 한다. 스파벨리 서쪽 약 300미터 지점 신천 가운데 ‘寒泉’ 두 글자가 새겨진 거대한 바위가 있다. 임재 서찬규 선생과 관련된 흥미로운 전설을 간직한 바위로 글자는 임재 선생이 직접 썼다.

○ 제2곡 흥덕(興德)
가창면 행정리 일원이다. 약 500년 전 홍씨 성을 가진 사람이 처음 터를 잡았다고 한다. 이후 ‘송덕’이라는 인물이 충청도 대덕에서 이곳으로 이주, 후손이 흥하라는 의미로 흥덕이라 이름 지었다고 한다. 흥덕 남쪽에 ‘퇴계리’가 있는데 구전에는 퇴계 선생이 이 마을에 하루 머물렀다고는 하나 확인된 바는 없다. 한천서원·송병규효자비·효부경주김씨비 등이 있다.

○ 제3곡 척령산(鶺鴒山)
단산리 동쪽에 있는 산이다. 단산리는 북쪽을 제외하고는 3면이 산으로 둘러싸인 마을이다. 약 600년 전 달성배씨가 처음 정착했다고 한다. 단산이란 이름은 마을의 흙빛이 붉어서 붙은 이름이다. 쌍벽당 이원생을 기리는 함벽정, 서암 서혜를 기리는 염수재 등이 있다.

○ 제4곡 옥녀봉(玉女峯)
대일1리 서쪽에 솟아있는 삼각형 모양 산봉우리다. 대일1리는 영동김씨가 처음 터를 잡고, 이후 달성서씨 용계 서변의 후손들이 터를 잡았다고 한다. 처음에는 대일박으로 불리다 나중에 대일이 됐다. 대일2리는 밀양박씨가 처음 터를 잡고 뒤에 김해김씨·달성배씨가 자리를 잡았다. 과거에 학암 서균형과 옥계 서변을 제향하는 옥계서원이 있었지만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 제5곡 금곡(金谷)
수짐·쉬짐·쇠점 등으로 불리는 삼산리 자연부락 ‘금동’으로 평택임씨 집성촌이다. 임란 직전 아무런 이유 없이 산이 헐벗기 시작해 ‘쇠점’이라 불렀다고 한다. 지명에 금(金) 자가 있어 일제강점기 때 마을 여러 곳에 금굴을 팠는데 그 흔적이 지금도 남아 있다고 한다

○ 제6곡 삼산(三山)
남쪽에는 팔조령이 있고, 동서는 산에 둘러싸인 삼산리 신천 변 자연부락이다. 한양 길인 팔조령을 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하는 마을이다. 항상 외지인들로 붐볐던 마을임에도 예전부터 살인사건 같은 강력범죄가 없었다고 한다. 이는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삼산, 즉 세 산 때문인데 두 산이 싸우면 반드시 한 산이 말렸기 때문이라는 재밌는 전설이 전한다.

○ 제7곡 녹문(鹿門)
우록동 초입으로 인궁·인급·인곡이라고도 한다. 우록(友鹿)은 임란 때 조선에 귀화한 왜군 장수 모하당 김충선이 정착한 마을이다. 우록이란 지명은 사슴과 벗하며 은거하기 좋은 곳이란 뜻이다. 이곳에는 김충선을 제향한 녹동서원과 달성한일우호관 등이 있다.

○ 제8곡 자양(紫陽)
우록1리 자연부락으로 녹동서원 인근이다. 자양이란 지명은 마을 뒷산에 김충선의 묘를 쓰고 난 뒤 사흘 동안 검붉은 햇빛이 비췄다고 해서 얻은 이름이라고 한다. 자양을 비롯한 북쪽 백록, 서쪽 황학, 동쪽 봉암과 한천 등의 지명은 모두 주자와 관련 있는 지명이다.

제9곡_백록_백록당

○ 제9곡 백록(白鹿)
우록2리로 남지장사 가는 길에 있는 산골마을이다. 약 400년 전 백록당 우성범이 처음 터를 잡았다고 한다. 처음에는 선유동이었다가 후에 백록동이 됐다. 상백록에는 우성범을 기리는 백록당이 있고, 하백록에는 우당 허욱이 건립한 백록동서당이 있었는데 현재는 백록당만 남아 있다.

<다음에 계속>

송은석 (대구시문화관광해설사) / e-mail: 3169179@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