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숨을 바쳐 아비를 구한 ‘사효자굴’


테크노폴리스 입구 쌍계오거리에서 비슬산 방향으로 좌회전해서 올라가면 ‘사효자굴’이라는 표지판이 보인다. 표지판 앞에 차를 세우고 약 150m만 걸어가면 굴이라고 하기엔 좀 애매한 거대한 바위들이 머리를 맞대고 서있다.
상성폭포에서 내려오는 맑은 물이 가득 흐르는 수로를 따라 걷는 길이 호젓하고 아름답다. 하지만 굴 입구에 다다르면 갑자기 매우 가파른 계단이 나타나는데 그 옛날 늙은 아비를 등에 업고 이 가파른 산위 바위에 숨어들었을 그들의 처지와 고단함이 느껴져 벌써부터 분위기는 숙연해진다. 굴이라고 하지만 비바람이 그대로 들이칠 것 같은 커다란 바위 대여섯 개가 전부다. 성인은 허리를 구부려야 바위 입구를 통과하는데 늙은 아비가 누워 있었을 법한 자리를 가늠해보니 당시 우리 민초들이 겪었을 고초와 황망함이 그대로 전해져 참담한 기분이 든다.
현풍현 곽재훈은 선비로 슬하에 4형제(결, 청, 형, 호)를 두었으며, 너무나도 유명한 임란의병장 홍의장군 곽재우의 사촌형이다. 임란 때 현풍고을도 왜적들이 양민을 무작정 탄압하며, 수탈과 강제동원으로 피난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아들 4형제는 병든 부친을 모시고 바위 굴 속에 숨어 피난하였다. 천식을 앓는 아버지의 기침소리 탓에 왜장에 발견되어, 왜적이 칼로써 부친을 해치려하자 아들들이 막아서며 차례대로 죽임을 당하였다. 왜장은 눈앞에서 벌어진 효행에 감동하여 부친을 살려 석방하여 등에 ‘四孝子之父’라고 쓴 패를 달아 보내니, 다른 왜적들도 다시는 손을 대지 못하였다.
마을 사람들은 죽임을 당했던 굴의 바위에 사효굴(四孝窟)이라 새겼으며, 선조임금은 효자사공 정려를 내려 나라 안 모든 사람들에게 전하였다. 효자사공(孝子四公) 정려는 곽씨문중의 다른 정려들과 함께 현재 솔례마을 입구에 있는 12정려에 봉안되어 있다.
실제 있었던 일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전설처럼 느껴지는 것은 효사상을 전래동화 속의 이미지로 박제화시켜 고리타분하다고 치부하고 우리 스스로가 효와는 담쌓고 살기 때문이 아닐까? 한해를 마무리하는 시점에서 효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는 의미 있는 취재였으며 독자들에게도 같은 마음이 전해지길 바래보며 비슬산 나들이 길에 꼭 한번 들러보시길.

서순옥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