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고장 문화유적 탐방] 142. 사람을 얻어야 이름값을 한다, 한천(寒泉)바위

1) 프롤로그
필자가 좋아하는 문장이 있다. 한말 선비 회당 장석영 선생이 지은 「제일강산정기」다. 이는 달성군 구지면 내리 낙동강가에 있는 이로정(二老亭)이란 정자의 내력을 기록한 글이다. 이로정은 한훤당 김굉필과 일두 정여창 두 선생의 유적. 이 글에 이런 문장이 있다. ‘사람을 얻으면 주먹만 한 돌도 곤륜산보다 높을 수 있고, 사람을 얻지 못하면 태산 같이 높은 산도 언덕보다 못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사물이 세상에 이름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반드시 사람을 얻어야 한다는 말이다. 이번에는 달성군 가창면 냉천리 계곡 한 가운데 서 있는 한 바위를 통해 이 말의 속 뜻을 한 번 알아보기로 하자.

2) 과거 대구사람들의 여름 피서지, 냉천
1970년대 후반에서 1980년대 초. 대구에는 시민들의 여름철 피서지로 유명한 곳이 몇 곳 있었다. 그 중 필자가 특별히 기억하는 피서지는 냉천(冷泉)이다. 냉천은 수성구 파동 가창교에서 달성군 가창면 용계리와 냉천리로 이어지는 계곡으로 신천 상류다. 계곡이라 하기엔 너무 평탄하고 개울이라 하기엔 골이 제법 깊고 험하다. 어린 시절 부모님과 함께 종종 냉천으로 물놀이를 간 적이 있다. 아버지 친구 분의 품에 안겨 돌다리를 건너다 물에 빠졌던 기억, 어른들이 물가에 찜통을 걸어놓고 백숙인가, 염소탕인가를 준비하던 모습 등이 기억난다.
대구사람에게 있어 냉천은 아주 친숙하다. 50대 이상 기성세대에게는 더욱 그러하다. 어린 시절 필자는 냉천의 뜻을 몰랐다. 한자를 몰랐으니 당연했다. 하지만 초등학교 시절 한문서예를 하면서 자연스럽게 냉천의 의미를 알게 됐다. 냉천은 ‘찰 냉’에 ‘샘 천’, 차가운 물이 솟는 샘이란 뜻. 지금같이 도시화되기 전 우리네 과거 전통마을에는 ‘찬샘’이라 불리는 샘이 많았다. 찬샘이 곧 냉천이고 냉천이 곧 한천(寒泉)이다.

바위 좌측 상단에 寒泉 두 글자가 보인다
용계리와 냉천리의 경계 한천바위

3) 조선시대 유학자들의 은거지, 한천
찬샘을 한자로 표현한 것이 냉천이고 한천이다. 이 둘은 사람에 따라 받아들이는 느낌이 다르다. 예를 들어 유교나 유학에 관심 있는 사람들은 냉천보다는 한천이라는 말에 주목한다. 바로 주자의 강학공간이었던 한천정사(寒泉精舍)때문이다. 성리학 창시자인 주자가 자신의 어머니 장례를 치른 곳에 지은 정사가 한천정사다. 이곳에서 주자는 여조겸과 함께 불후의 명작 한 권을 집필했는데, 그 유명한 『근사록(近思錄)』이다.
조선시대 우리나라 유학자들은 성리학 창시자인 주자를 멘토로 삼고 공부했다. 주자가 저술한 책을 읽고, 주자가 거처했던 공간을 따라했다. 같은 유학서라도 주자의 학설과 다른 내용이 담긴 책은 멀리했다. 주자는 조선 선비들에게 있어 비교대상이 없는 최고의 멘토였다.
800여 년 전 중국사람 주자. 당시 그가 거처했던 중국의 지명과 같은 지명이 지금도 우라나라 전역에 많이 남아 있다. 우리 고장 달성군 가창면에는 한천 외에도 백록·옥녀·자양 같은 지명이 있고, 가창과 수성구 접경 지역에는 파동·무릉·무동 같은 지명이 있다. 이 모두가 주자와 관련 있는 지명이다. 이런 지명들이 언제부터 생겨난 것인지는 확실치 않다. 참고로 『대구지명유래총람』에는 한천을 600여 년 전 김해김씨가 이 지역에 터를 잡을 때 뒷산 계곡에 찬물샘이 많아 찬샘·한천이라 했다고 되어 있다. 하지만 지금처럼 한천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된 데는 한천바위의 역할이 컸다.

4) 한천바위와 임재 서찬규
가창면 용계리와 냉천리의 경계지점. 신천 변을 따라 나 있는 가창 옛길과 새로 개통된 고가차도가 교차하는 지점 신천 한 가운데 거대한 바위가 하나 있다. 바위 한쪽 면에 ‘寒泉’ 두 글자가 새겨진 한천바위다. 이 글자는 한말 대구출신 유학자인 임재 서찬규 선생의 글씨다. 임재 선생에 대해서는 본 지면 『99. 조선말 대구 큰선비 임재 서찬규와 낙동정사』 편에서 이미 소개한 적이 있다. 한천바위 앞 도로변에 달성군에서 세운 ‘한천바위 전설’ 안내판이 서 있다. 사실로 믿기에는 좀 의심스런 구석이 있지만 전설이라고 하니 그대로 이해해도 크게 나쁠 건 없을 것 같다.

한천 가운데 큰 바위가 하나 보이는데 바위에 한천이란 글이 쓰여져 있다. 이 바위는 옛날부터 사람들이 왼쪽 손으로 바위 위에 돌을 던져서 바위 위에 얹히면 아들을 낳고 얹히지 못하면 딸을 낳는다고 전해진다. 지금부터 약 150년 전 이곳에 임재 서찬규란 분이 살았는데 글도 잘하고, 가세가 부유하여 부러울 것이 없었으나 슬하에 자식이 없었다고 한다. 마을사람들의 권유로 이 바위에 가서 돌을 던져 보았다. 그런데 그 돌이 단번에 꼭대기에 얹혔다. 기뻐 집으로 돌아와 부인과 잠자리를 같이 했더니 부인이 잉태를 하였고, 해산날만 초조하게 기다렸는데 부인이 드디어 아들을 낳았다고 한다. 서찬규는 기뻐하여 “내가 아들을 얻은 것은 오로지 바위의 덕이다”하고 그 바위에게 보답하기로 작정했다. 그러나 바위에 음식이나 돈을 줄 수 없어 곰곰이 생각하다 바위에 이름을 지어주기로 했다. 고민 끝에 마침 그 바위가 있는 냇물이 아주 차고, 지명도 한천이므로 한천이란 이름을 짓고 바위에다 한천이라 새겼다고 한다. 최근까지도 사람들이 던진 돌이 바위에 수두룩했으나 요즘은 돌도 없어지고 돌을 던지는 사람도 없으나 이름만 ‘한천바위’라고 전한다. [한천바위 전설 안내판]

5) 에필로그
『제일강산정기』의 메시지는 삼라만상은 크고 작음이 아니라 어떤 사람을 얻느냐에 따라 이름값이 달라진다는 것. 일례로 그리 높지 않은 태산이 세상에 널리 알려진 것도 공자라는 인물 때문이라는 것이다. 600년 전부터 불렸다는 한천이란 지명과 그 보다 훨씬 더 오래되었을 한천바위. 만약 이 거대한 바위가 임재 서찬규라는 인물을 만나지 못했다면 지금도 무명이거나 아니면 그저 그런 바위로 불렸을 것이다. 그렇다. 한천과 한천바위는 임재 서찬규라는 사람을 얻음으로써 세상에 알려지고 빛을 볼 수 있었다.

…천하에서 산을 치기를 태산을 제일로 삼는다. 그것은 공자가 천하를 작게 여긴 까닭에 상대적으로 태산이 높아진 것이다. 우리나라는 산이 사방으로 둘러있어 태산 못지않게 높고 빼어난 산들이 많다. 그러나 태산처럼 세상에 이름이 난 산이 있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이는 공자 같은 인물이 없기 때문이다. (중략) 대개 산이 이보다 높은 것도 그러한 평가를 받지 못하는데 제일이란 명칭이 도리어 이 조그마한 언덕에 있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그것은 그 까닭이 사람에게 있는 것이지, 산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을 얻으면 주먹만 한 돌도 곤륜산보다 높을 수 있고, 사람을 얻지 못하면 태산 같이 높은 산도 언덕보다 못할 수가 있는 것이다. 두 선생[김굉필·정여창]이 동방의 성리학을 처음 일으키니 공자의 도가 비로소 밝아졌고, 돌아가신 뒤에는 공자의 사당에 함께 모셔졌으니, 이분들 역시 동방의 공자요, 또한 동방의 제일인이다. 제일인이 지나간 강산이 곧 제일강산이 되는 것이 옳지 아니한가…[「제일강산정기」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