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묻고 답하다] 청백리의 표상

중종 때 승지를 지낸 유학자 김정국(金正國)은 지방에 내려가 있는 친구한테 이런 편지를 써서 남기고 있다.
“듣건대 그대의 의식주가 나보다 백배나 낫다는데 어찌하여 그칠 줄 모르고 재산을 모으오? 선비에게는 오직 책 한 보따리, 거문고 하나, 벗 한 사람, 신발 한 켤레, 베개 하나, 바람을 통하게 할 창 하나, 햇볕을 쪼일 마루 한 쪽, 차를 끓일 화로 하나, 늙은 몸 부축할 지팡이 하나, 봄 경치 찾아다닐 나귀 한 마리면 족한 거요. 이 열 가지가 비록 번거롭기는 하나 빼놓을 수 없는 것이오.”
같은 시절 장필무(張弼武, 1510∼1574)라는 사람이 양산군수로 있을 때 그 곳 병마사가 이것저것 요구하는 게 많았다. 그러나 장필무는 법에 규정된 것 이외에는 쌀 한 톨 내주는 일이 없었다.
드디어 화가 뻗친 병마사가 군사들을 이끌고 달려와 호령했다.
“시골 목사 따위가 대관절 무엇을 믿고 감히 내 청을 거절한단 말인가?”
그러자 장필무는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이렇게 대답을 하는 것이었다.
“내가 믿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다만 고향에 두 칸짜리 초가집이 있으니 오직 그걸 믿을 뿐이오.”
잘못한 일이 없으니 아무 때라도 그만두고 고향에 내려가면 그만이라는 배짱을 말한 것이다. 병마사는 그만 머쓱해져 다시는 부정한 청탁을 못했다고 한다.
연산군 시절의 정붕(鄭鵬, 1467∼1512)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다.
정붕은 연산군한테 바른말을 하다가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긴 사람이었다. 그런데 정붕이 청송부사로 있을 때 당시 영의정 성희안으로부터 꿀과 잣을 좀 보내달라는 기별이 왔다. 청송은 석청꿀과 잣의 명산지였던 것이다.
정붕은 편지를 써 보냈다.
“잣은 높은 산꼭대기에 있고 꿀은 백성들의 벌통 속에 들어 있는데 그것들을 지켜줘야 할 제가 어디 가서 그 물건을 구한단 말입니까?”
성희안은 그 편지를 받고는 크게 후회하여 정중하게 사과의 말을 써 보내고, 정붕의 편지를 여러 사람에게 보여 주었다고 한다.
과거 우리 조상들이 금전의 유혹을 슬기롭게 극복한 사례는 물질만능주의로 물든 오늘날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구용회 건양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