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 들녘 ‘허수아비의 하루’

올해 유난히 긴 장마와 태풍으로 힘든 시간을 보냈지만 그래도 가을이 되니 황금 들녘은 풍성한 수확을 내어주고 있다. 햇살이 따뜻한 가을 들녘을 산책하다 재미있는 허수아비를 만났다. 옛날에는 이맘때 시골에서는 허수아비가 흔했는데 참으로 오랜만에 보는 허수아비였다. 얼마 전 차를 타고 가다보니 망가진 마네킹을 밭 곳곳에 세워둔 걸 보고 재미있어 웃기도 했었다. 시골에서 자란 기자는 직접 허수아비를 만들어 참새를 쫓기 위해 논에 세우기도 했는데 그런 아련한 추억이 떠올라 보기만 해도 흐뭇했다.
예쁜 모자를 쓰고 화려한 옷을 입은 모양새를 보니 허수애미라고 불러야 하나 뭐 이런 싱거운 생각을 하면서 혼자 웃고 있는데 마침 밭머리에서 일하고 계신 할머니를 만났다. 할머니에게 이 허수아비 직접 만드셨냐고 여쭤보니 그렇단다. 허수아비를 왜 세웠냐고 여쭤보니 할머니는 마침 누군가에게 그 얘기를 하고 싶으셨던지 낯선 이에게 하소연을 하신다.
“이노무 놀개이(노루)란 놈이 내려와 무시싹을 다 묵는기라. 고구마는 멧돼지한테 다 뺏기고… 참새가 하도 날아와 수수를 다 빼먹어싸서 하답답아가 저래 세워놔 봤는디 아무 소용이 없는기라. 말 그대로 허재비여 허재비. 허허허~~.”
할머니의 구수한 사투리가 허수아비만큼이나 정겹다.
요즘은 이런 정겨운 허수아비 대신 좀 더 실질적인 장비들이 동원된다. 참새를 쫓기 위해 펄럭이는 무서운 독수리 모양 연은 그래도 애교다. 애써 지은 농작물을 새나 짐승에게 뺏기지 않기 위해 큰돈을 들여 울타리를 하거나 그물로 과수원 전체를 덮기도 하고 정기적으로 총 쏘는 소리를 들려주기도 한다. 심하면 전기 울타리를 하기도 한다.
참새를 쫓는 허수아비를 비웃듯 허수아비의 낡은 밀짚모자 위에 앉아 있는 참새를 보면 그래도 귀엽고 정겨웠는데 요즘 살벌한 장비들은 그야말로 짐승들과의 전쟁이다. 할머니 말씀처럼 오죽 답답하면 그렇게들 하겠는가? 소용이 없는 줄 알면서도 논둑에 세워두었던 허수아비의 정취는 사라진지 오래다. 그래서인지 할머니의 허수아비가 더욱 정겹게 느껴졌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 불렀던 허수아비 동요가 생각나 노래를 흥얼거리며 가을햇살이 내리쬐는 들판을 걸어간다.

하루 종일 우뚝 서 있는 성난 허수아비 아저씨∼
짹짹짹짹짹 아이 무서워. 새들이 달아납니다.
하루 종일 우뚝 서 있는 성난 허수아비 아저씨∼♪

서순옥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