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고장 문화유적 탐방] 125. 정암 곽월과 남계서원 유허지

1) 프롤로그
지난 주 곽준·곽재우 신도비에 이어 이번에도 유가읍 가태리 유적 한 곳에 대해 알아보자. 이번에 소개할 유적은 말 그대로 사라지고 없는 문화유적이다. 가태마을은 곽준·곽재우 신도비가 있는 구례마을 동쪽 가태천변에 자리한 마을로 가태리 중심마을이다. 가태마을에서 가태천을 건너 비둘산[647m] 기슭을 5분 정도 오르면 달성군 지정 400년 느티나무 보호수와 180년 은행나무 보호수가 있다. 그 뒤편으로 무성한 대숲이 있는데 이 대숲 속에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 ‘남계서원’이 있다(?).

2) 곽재우 장군 아버지 정암 곽월
곽월[郭越·1518-1586]은 지금의 현풍 솔례마을에서 태어났다. 29세[1546(명종 1)]에 사마시, 39세에 별시문과에 급제했다. 승문원 정자로 관직생활을 시작 대동도 찰방·영천군수를 지낸 뒤, 솔례마을로 돌아왔다. 이후 대구부사, 상주목사에 천거됐으나 부임하지 않았고, 55세에 사헌부 장령, 56세에 사헌부 지평·사간원 사간을 지냈다. 57세에 의주목사, 60세에 호조참의, 61세에 동지사로 명나라를 다녀왔다. 명나라 사신행을 다녀온 직후 황해도관찰사에 제수됐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64세에 제주목사에 제수됐으나 고령으로 대신 청송부사로 부임했다. 68세[1585(선조 18)]에 남원부사로 부임한 직후 병으로 사직, 고향 솔례로 돌아와 이듬해 69세를 일기로 졸했다. 선생 신도비에 기록된 일화 몇 가지만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 대동도 찰방으로 있을 때 당시 명종 임금의 총애를 받던 권신 윤원형의 종이 도포를 입고 신을 신은 채 계단을 오른 일이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선생이 노하여 윤원형의 종에게 매질을 했는데, 사람들이 그 소문을 듣고 통쾌하게 여겼다.
○ 고을수령의 불법행위는 어사에 의해 조정에 보고되어 심한 경우 수령이 사형을 당하기도 했다. 이처럼 수령에게 있어 어사는 정말 두려운 존재였다. 그래서 어사를 호행(虎行)이라고도 했다. 선생이 하루는 관청에서 사무를 보는데 어사 윤근수가 갑자기 들이닥쳤다. 하지만 선생은 동요하지 않고 하던 일을 마무리했다. 이를 본 윤근수는 “내가 암행하여 주현을 살핀 적이 많았으나, 일처리를 이 사람같이 하는 예를 본 적이 없다”며 감탄했다.
○ 고을수령들이 조세를 내지 못해 백성들의 삶이 극도로 궁핍한 때가 있었다. 그때 선생이 직접 나서 조세관련 문서를 불태우고, 대신 모곡으로 조세를 충당하자 관리와 백성이 기뻐하며 감사해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고을을 떠날 때 선생이 만류했으나 고을민들이 비를 세워 선생을 기렸다.
○ 북방 국경지역인 의주목사로 있을 때 백성들의 교화를 위해 학교를 세우고 학문을 일으키니 백성들이 흥학비를 세워 보답했다.
○ 남원부사로 있을 때 관찰사가 남원에 이르자 창기를 곁에 끼고 동행하고자 했다. 선생이 노하여 말하기를 “이는 나를 무시하는 것이다. 노부가 비록 폐퇴하고 관찰사가 존귀하다 할지라도 어찌 창기를 끼고 내가 있는 부를 지나갈 수 있는가”하고 기생의 음식을 준비하지 않았다. 이 일로 선생은 낮은 고과를 받아 파직됐다.
○ 선생은 무예에도 능했다. 공무에서 물러나면 늘 활을 당겼는데 백발백중이었다. 이를 두고 조정에서는 선생이 문무를 모두 겸했으니, 나라가 편안할 때나 위급할 때 크게 쓰일 인물이라 칭찬이 자자했다.

3) 아! 남계서원이여
남계서원(藍溪書院)은 정암 곽월 선생을 기리기 위해 1860년(철종 11)에 건립, 1871년(고종 8)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 훼철됐다. 이후 연도미상 시기에 ‘남계서당’으로 중건됐으나, 2000년을 전후한 시기 퇴락하여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필자는 본 지면을 통해 현재 우리고장에 남아 있는 서원 16곳을 모두 소개한 바가 있다.[달서구(3)·달성군(13)] 여기에는 덕동서원과 남계서원 두 곳이 빠졌는데 이 둘은 현존하지 않는 서원이다.
이번 연재를 위해 필자는 지인의 도움을 받아 지난 2020년 7월 2일, 홀로 남계서원을 찾았다. 자료사진 속 옛 건물 모습을 조금이라도 확인해 볼 수 있을까하는 기대로 찾은 것이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무성한 대숲 외엔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었다. 빽빽하게 자란 대숲을 헤치고 들어가 보니, 서원이 있었던 자리로 추정되는 터도 모두 대밭이 되어버렸다. 이곳에 서원이 있었다는 흔적은 오직 입구에 서 있는 수령 180년 은행나무와 길게 둘러진 돌담, 대숲 속 평탄하게 조성된 서원 유허지 뿐이었다.
자료에 의하면 훼철 후 격을 낮춰 서당으로 중건된 남계서당은 정면 4칸, 측면 2칸의 홑처마팔작지붕 건물로, 정면에서 마주 보았을 때 좌측에서부터 2칸 온돌, 2칸 대청 구조였다. 뜰 한쪽에는 정면 3칸짜리 부속채도 있었다.

4) 옛날 현풍 동헌이 있었던 가태리
가태리는 마을이 아름답고(佳), 크다(泰)해서 가태리다. 가태리에는 지금도 가태·구례·남통·석새미 등의 자연마을이 있다. 주민들의 전언에 의하면 고려시대 때부터 가태에는 관아가 있었다고 한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일부 향토사 자료에서는 조선 세종 때, 현풍현감 채석견이 이곳 가태에 있던 동헌 건물을 현풍으로 옮겨 현풍관아를 지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주민들은 지금도 감옥과 창고가 있었던 터를 옛 명칭 그대로 부르고 있다.
가태와 구례 사이 도로변에는 ‘도래실’이라 불리는 안동김씨 문중선영이 있다. 국도변 평지에 조성된 이 선영은 돌담과 함께 선영을 둘러싼 도래솔[소나무 숲]이 보기 좋아 예전에는 지역 초등학생들의 단골 소풍지였다고 한다. 먼저 예연서원에 들러 곽재우 장군의 칼을 관람한 뒤, 곧장 도래실로 가서 도시락을 먹었다고.
이 지역에는 예로부터 길가에 너덜돌을 돌담처럼 쌓은 돌무더기가 길게 이어져 있었다고 한다. 이 돌담을 따라 나리가 자생했는데, 한여름 철이면 나리꽃이 만발한 가태리 돌담길이 장관이었다고 한다.

5) 에필로그
문화유적답사를 하다보면 간혹 기쁨으로, 혹은 슬픔으로 눈물이 날 때가 있다. 묻고 물어 힘들게 찾아간 남계서원, 하지만 있어야할 서원은 온데간데없고 무성한 대숲 속 유허지를 확인하는 순간 왈칵 눈물이 났다. ‘이렇게 또 하나가 사라졌구나.’ 씁쓸한 마음을 뒤로하고 대숲을 빠져나와, 이곳 수문장격인 느티나무와 은행나무에 두 손 모아 인사를 했다. 이렇게 자리만이라도 지켜주어 고맙다고. 그런데 필자의 마음이 통한 것일까? 두 수문장이 메시지를 보내왔다. ‘이보게, 슬퍼하지 말게나. 흥망성쇠 그게 역사라네!’

송은석 (대구시문화관광해설사) / e-mail: 3169179@hanmail.net

느티나무와 은행나무 뒤 대숲 속이 남계서원 휴허지다
대숲 속 돌담만 남은 남계서원 휴허지